[잊지말아야 할 우리지역 독립영웅들]
[충청투데이 서유빈 기자] 아직까지 후손을 찾고 있는 충청 본적의 독립운동가 547명 중 사진이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 위주로 추려 지면을 통해 조명한다. 조국 독립을 위해 젊음과 혹은 삶까지 놓았던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을 찾는데 끝내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후손찾기 명단에 등록된 독립유공자의 후손인 경우 제적부, 족보 등 관련서류를 갖춰 보훈부로 후손 신청을 하면 된다. 후손 등록 후 훈장을 전수 받을 수 있다.
[조선의용대 서안판사처 주임… 목숨바쳐 지킨 조국]
1935년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에서 혁명활동에 참가하다가 1938년 5월 중국 중앙유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을 제6기로 졸업하고 조선청년전시복무단에서 항일선전 임무에 전력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조선의용대에 가입해 제5전구와 제1전구에서 대적선전사업에 종사했다. 1940년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에 가입해 활동했고 서안으로 가서 조선의용대 서안판사처 주임에 임명됐다. 이듬해인 1941년 조선의용대는 적후방의 혁명부장대오를 건립하기 위해 대적선전과 유격전을 진행해 전후 수십 차례의 격전을 치렀다. 특히 그해 12월 12일 하북 호가장 전투에서 적의 공격에 맞서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 순국했다.
[재만농민동맹 결성 기여… 중국공산당 유격대 편성 힘써]
장재욱은 1925년 음력 7월 정의부 가입을 기점으로 항일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1927년 5월에는 한족노동당에 가입하고 1928년 칭위엔현 남산성 지방대표로 중앙대표대회에 참가해 재만농민동맹을 결성하는데 기여했다. 또 1929년 5월에 조선공산당 지부 만주총국에 가입해 그 아래 재만농민동맹을 두고 자위대를 설치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1930년 8월 재만농민동맹 해체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만주성 남만특위군사부의 위원이 됐다. 이때 재만농민동맹의 군인을 중국공산당 유격대로 편성하기 위해 힘썼다. 1930년 9월 자위대 17명을 데리고 칭위엔현에서 무기 탈취를 위해 중국인 보갑대를 포위 습격했다. 이후에도 부하들을 이끌고 류허현 싼위안바오 일대에서 친일 한국인에 대한 선도와 밀정 처단 등의 무장 활동을 전개했다. 1932년 1월 중순 하이롱 영사 경찰에 체포돼 신의주로 압송됐으며 3월 22일 신의주 검사국에 송치됐다. 1933년 4월 5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살인’ 혐의로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일제에 맞서 무력투쟁… 남만에서 이어진 항일의지]
1905년 이강년을 따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무력투쟁을 전개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한국이 강점당하자 남만지역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합니하 산골에서 백서농장을 만들고 둔전제로 군인을 양성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가해 모험대를 조직하고 국내에 진입해 적기관을 파괴, 적의 밀정을 처단하는데 주력했다. 1920년 본부가 길림 방면으로 이동한 후에는 신용관·김소하 등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해 제1중대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5월에는 강계군 문옥면 주재소를 습격했으며 그해 7월에는 이덕창을 시켜 친일파인 후창군수 권응규를 사살하게 했다. 1921년에는 관전현에서 공격해오는 일경을 격퇴하고 관전·즙안 등 각 현에 있는 친일기관인 일민단·보민회·강립단 수십개소를 습격해 제거했다. 1922년에 대한통의부에 가담해 제1중대장으로서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하지만 전덕원 등과 의견의 마찰로 통의부가 분열되자 남만의용군 대표로서 상해임시정부에 파견돼 교섭한 결과 김승학·이유필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직할의 주만참의부를 설립하게 됐다. 참의장 겸 제1중대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24년 5월에는 이의준·김창균에게 국경을 순시하던 재등실 총독을 저격하도록 지시했다.
[광주봉기 참여·조선혁명군 양성… 용감했던 여정]
1919년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의열단에 가입해 암살 및 파괴공작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1월 중국에서 국공합작을 성사시키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자 그가 속한 의열단 역시 의열투쟁에서 대중투쟁으로 노선을 전환하게 됐다. 1926년 3월 김원봉·박효삼 등 의열단원들과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으로 입교한 그는 보병과에 소속돼 전술학·군제학·병기학·군대정치공작 등을 학습하고 10월 졸업했다. 황포군관학교 졸업 후 중국의 국민혁명군 초급장교로 임관하고 김원봉과 함께 광동에 머물며 의열단을 혁명정당으로 전환할 것을 결의하는 한편 그해 12월 일어난 광주봉기에 박건웅 등과 함께 참여해 반일혁명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1932년 장개석의 원조로 김원봉이 중국 남경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교외의 탕산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하자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생 대부실 교관으로 부대교련 등을 담당, 사관생도를 양성·파견해 독립운동 일선에서 활동하게 했다. 1933년 말에는 남경 중앙육군군관학교 교육총대 제4대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1935년 북경에서 의열단원 김시현 등과 함께 한인 부일배를 처단했고 하남성 개봉에서 일제 비밀 정보원인 중국인을 처단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1944년경 일경에 붙잡혀 순국했다.
[‘자유민보’ 발행으로 독립 여론 형성… 날카로운 글의 힘]
‘자유민보’는 1919년 3월 하순경 최석인·백광필·류연화 등이 모여서 독립문제에 관해 여론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자신들의 취지를 밝힌 전단을 만드는데서 시작됐다. 이들은 조선국민자유단의 이름으로 "조선을 일본의 통치 하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이 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최후의 1인까지 분투할 각오가 돼 있다"는 취지의 경고 문안을 담은 전단 300매를 인쇄해 동대문 주택가에 투입 배포했다. 최석인·백광필·류연화는 자유민보라는 제목으로 저작물을 출판할 것을 모의하고 백광필은 류연화에게서 자금 30원을 받아 인쇄 준비를 했다. 류연화는 논설을, 최석인은 기타 기사를 기초하기로 했다. 그들은 4월 1일부터 중순까지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조선은 독립해야만 한다"는 취지의 논설기사를 자유민보 제1호부터 제5호까지 실었다. 백광필은 자유민보를 인쇄·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1919년 5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했다. 1919년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자 고등법원에 상고했다. 1919년 8월 28일 상고가 기각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1년 2월 17일 출소했다.
[앞장서 외친 "대한독립만세"… 붙타오른 독립 열정]
김양칠은 충남 서산군 대호지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19년 4월 4일 대호지면 면민 약 400명은 면사무소 앞에 집결했다. 이인정이 군중 앞에 나서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나아가자고 연설했다. 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앞세우고 천의시장을 향해 행진을 개시했다. 송재만은 대호지면사무소부터 천의 시장까지 도로에서 인쇄된 애국가 약 400매를 군중들에게 배포했다. 천의시장에 도착한 김양칠을 비롯한 송재만, 한운석 등은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했다. 같은 날 오후 4시경 천의시장에서 군중이 철수하려 할 때 부근 염건피장 쪽에서 천의경찰관주재소 순사 상원당정은 순사보 이재영 등과 함께 군중으로부터 태극기를 압수하려 했다. 하지만 군중은 응하지 않았고 경찰이 권총을 발사했다. 군중은 크게 격앙돼 도주하는 순사들을 추격해 붙잡았다. 김양칠을 비롯해 군중들은 주재소에 투석하고 순사와 순사보를 응징, 주재소의 유리창과 현관 게시판 등을 부셨다. 이 시위로 체포된 김양칠은 그해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항소했다. 그러나 1920년 2월 7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됐다.
서유빈 기자 syb@cctoday.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