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덕률 前 대구대학교 총장
APEC 정상회의 때였다. 한미, 미중, 한중, 한일 정상회담이 숨 가쁘게 이어졌다. 온 국민이 기도하는 심정으로 경주발 속보에 귀 기울였다. 우리 기업, 무역, 민생, 평화의 운명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사장 주변은 달랐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구호들이 터져 나왔다. ‘윤 어게인’. 경주 시내를 누빈 극우 집회에서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윤석열을 구해줄 것이라는 기대 섞인 주장도 등장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시위대열에 청년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라의 미래가 걱정스러워졌다. 대책이 시급한 이유다.
# 극한경쟁, 불안, 희생양 찾기
청년 극우화의 첫 출발점은 ‘불안’이다. 극한경쟁에서 낙오한 청년들에게서 먼저 발견된다. 학교성적 경쟁, 일류대학 입시경쟁, 취업 경쟁에서 연거푸 낙오한 청년들은 좌절하며 불안에 빠진다. 평생을 곤궁하게 살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떨치지 못해서다. 경쟁에서 한두 번 뒤처진 청년들이 경험하는 세상은 더 차갑기만 하다. 재기를 돕는 격려와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낙오자, 루저라는 낙인에 몸서리친다. 학교는 물론이고 가정도 포근하지 않다. 불안과 체념은 청(소)년 세대 심리의 중요한 특징이 된다. 실제로 우울 장애와 조울증 환자의 연령대별 비율도 20대, 30대, 10대 순으로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11월 6일. 국립정신건강센터가 발표한 보고서에서였다. 천문학적인 집값은 한 가닥 남은 작은 의욕마저 꺾어버린다. 이젠 그 어떤 노력도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청년이 늘고 있다. 기성세대를 향한 지독한 냉소가 떠돈다. 급기야 ‘세상 망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좀더 들여다보면 놀라운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경쟁에서 탈락하거나 낙오한 청년들만 불안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적좋은 중고등학생, 상위권 대학생, 안정된 직장을 잡은 청년들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자신도 언제 곤두박질칠지 모른다는 강박 때문이다. 역시 극한경쟁과 그것이 낳은 무거운 긴장의 결과다.
불안이 깊어지면 분노를 낳는다. 그 분노는 대개 두 가지 길로 이어진다. 하나는 ‘뒤처진’ 자신에 대한 자학이다. 은둔 심지어 자살의 길이다. 지난 10년 사이 10대 자살자는 10만 명당 4.2명에서 8.2명으로, 20대 자살자는 16.4명에서 22.5명으로 가파르게 늘었다. 지난 6월의 통계청 발표였다. 우리의 미래가 심각하게 멍들고 있다는 징표다.
다른 하나는 나를 낙오하게 만든 누군가를 찾아 공격하는 것이다. 자신을 부당한 피해자, 억울한 희생자로 생각하고 그렇게 만든 ‘밖의 원인, 가해자’를 찾아 공격하는 것이다. 문제는 밖의 원인을 찾는 과정이 논리적이지도 정확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어이없게 가해자로 낙인찍힌 이들은 대개 사회적 약자일 가능성이 크다. 2천년 전 예수, 나치 하의 유대인, 1923년 간토 대지진 때의 조선인도 모두 가해자로 낙인찍혀 죽임당한 희생양이었다. 최근 유럽과 미국에서 이민자들이 공격당하는 것, 우리나라에서 성소수자, 여성, 중국인이 극우 청년의 혐오 대상이 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제 더 미룰 수 없다. 서둘러 대책을 세워야 한다. 첫 단추는 사회와 정치권 모두가 청년 극우화 현상을 심각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 위에서 청년 극우화를 부추기는 원인과 경로를 정확하게 분석해 주요 요인별로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 종합 대책 강구해야
첫째, 청소년기의 경쟁은 대폭 완화되어야 한다. 한줄 세우기와 성적 석차가 평생을 결정하게 하는 교육은 폐기되어야 한다. 청소년을 극한경쟁으로 내모는 교육, 친구를 이겨야 할 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교육은 교육일 수 없다. 청소년기 때만큼은 협동과 배려, 사회적 공감 능력을 훈련받을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인권과 헌법 가치에 대한 감수성도 키워줘야 한다. 그것이 민주시민교육의 요체다.
둘째, 교육개혁은 사회개혁과도 연계되어야 한다. 청(소)년의 관점에서 사회개혁의 두 중심 가치는 ‘공정’과 ‘지속가능성’이다. 먼저 공정과 관련해 ‘학교성적에 기반한 능력주의’와 ‘승자독식 이데올로기’의 폐해에 청년과 사회가 함께 눈떠야 한다. 청년들은 또한 지금의 많은 제도들이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심지어 기성세대가 청년의 미래 몫을 약탈하고 있다고 믿는다. 노동정책, 연금정책, 기후정책 등을 설계할 때 청년의 이해관계를 적극 고려해야 한다. 기성세대가 청년의 미래를 책임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믿음을 줄 때 극우화하는 청년을 돌려세울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청년 극우화에는 개신교의 책임도 적지 않다. 개신교를 통해 사랑과 환대의 가치를 배우지 못한 청년들이 불안과 분노의 탈출구로 희생양을 찾아 혐오하고 공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웃사랑과 평화보다 적대와 혐오를 가르쳐온 근본주의 개신교의 성찰과 회개가 필요하다. ‘개신교는 극우’라는 불명예를 씻고 사랑과 평화의 개신교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청년과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고 개신교 자신의 미래도 열릴 것이다.
넷째, 혐오와 폭력으로부터 사회와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혐오할 자유’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터넷의 욕설, 조롱, 혐오는 청(소)년들에게 놀이와 문화가 된지 오래다.
인터넷에서만이 아니다. 집회 무대에서, 교실에서, 길가 현수막에서도 노골적인 혐오 표현이 넘쳐난다. 어떤 계기만 주어지면 순식간에 폭력으로 등장할 수 있는 위험한 수준이다. 혐오와 폭력으로부터 민주주의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법과 제도와 문화를 세워야 한다.
다섯째, 청년의 불안과 혐오를 부추기는 극우 정치권에 대한 단호한 대책도 중요하다. 어느 나라에서나 청년 극우화에 가장 책임있는 집단은 극우 정치권이다. 우리나라에선 윤석열이 대표적인 예지만 그와 절연하지 못한 채 여전히 ‘윤어게인’을 외치는 정치인과 주요 기관 권력자들이 적지 않다. 용인될 수 없는 반헌법적 일탈이다. 정치인과 권력기관의 극우 선동에 대해서는 깨어있는 민주시민의 눈 부릅뜬 감시와 심판이 필요하다.
청년 극우화를 ‘청년의 문제’로만 보는 것은 근시안이다. ‘교육과 종교의 실패’, ‘정치의 실패’가 빚어낸 사회적 병리로 봐야 한다. 당연히 교육자, 종교 지도자, 정치권이 팔걷고 나서야 한다. 함께 ‘청년친화 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서둘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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