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균 ETRI 기술창업실 책임연구원
지난달 말, 정부는 내년도 예산 728조원을 발표했다. 이 중 과학기술 R&D 예산은 사상 최대 규모인 35조 3000억원으로 전년(29조 6000억원) 대비 19.3% 증가한 수치다. 정부는 특히 인공지능(AI), 바이오, 콘텐츠, 방산, 에너지, 제조 등 국가 전략기술에 투자를 집중해, 이른바 ‘초혁신경제’로의 대전환을 추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막대한 예산만으로 미래가 열리지는 않는다. 핵심은 이 투자가 어떻게 실제 성과로 이어질 것인가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열쇠는 예산뿐만 아니라, 누가, 어떻게 라는 문제이며, 그 해답은 분명하다. 바로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에 있다고 본다.
출연연은 단순히 연구개발을 수행하는 기관이 아니다. 출연연은 국가와 사회가 직면한 난제를 해결하는 공공 혁신의 최전선에 서 있다. 민간은 실패 위험이 크거나 단기 수익성이 낮은 분야에 쉽게 투자하지 않는다. 예컨대, 탄소중립 기술, 국가 전력망 안정화, AI 기반 공공 안전망 같은 분야는 초기 투자비용이 크고 상용화까지의 기간도 길어, 민간이 감당하기 어렵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바로 출연연이다. 출연연은 국민 세금을 국가 전략자산으로 전환하는 기관이다. 사회는 필요로 하지만 시장이 감당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기술적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출연연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이다.
내년도 예산안에서 가장 주목할 변화는 ‘국가 대형 임무과제 100개 신설’과 ‘AI 예산 10조 원 투자’다. 정부는 PBS를 폐지해 소규모 과제를 줄이고, 국가 전략기술 중심의 초대형 프로젝트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를 민간기업 혼자 수행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초거대 AI 개발을 위한 GPU 5만장 확보, 완전자율주행 실증을 위한 AX 밸리 조성, 피지컬 AI 프로젝트 등의 범국가적 프로젝트는 기술개발을 넘어 산업 생태계 전체를 설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따라서 출연연은 민간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초기 리스크를 흡수하고, 상용화를 위한 기반을 마련해 민간 혁신의 발판을 제공해주어야 한다.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은 뛰어난 혁신 역량을 갖추고 있지만, 대규모 인프라·데이터·GPU·테스트베드에 접근하는 데 제약이 많다. 이를 위해 정부는 10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신설하고, AI·반도체·바이오 기업을 지원하는 모태펀드 2조원도 배정했다. 하지만 자금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기술개발→실증환경→표준검증→상용화로 이어지는 전주기 혁신 플랫폼이 반드시 필요하다.
출연연은 산업계와 학계, 정부를 연결하는 오픈이노베이션 허브로서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를 통해 기업의 성장 사다리를 구축하고 혁신 생태계를 뒷받침해 줘야 있다.
내년도 예산안의 핵심은 단순한 재정 확대가 아니다. 이는 선도형 혁신경제로 나아가겠다는 선언이다. AI·에너지·방산 등 첨단 전략기술 집중투자, 국민성장펀드 100조원 조성, 국가 대형 임무과제 100개 추진 등은 대한민국의 기술주권 확보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이는 출연연이 단순한 수탁기관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메시지이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먼저 설계하고 주도적으로 창출하는 선도 연구기관으로 도약해야 하는 것이다. 국가가 원하는 기술을 넘어 국가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출연연의 사명이다. 예산만으로 미래는 열리지 않는다. 정부는 AI·에너지·방산 등을 중심으로 초혁신경제로의 대전환을 선언했지만, 이 전략의 성패는 결국 출연연의 역할에 달려 있다고 본다.
출연연은 공공의 가치를 실현하고, 민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을 개척하며, 기업 혁신의 마중물이자 미래 창출의 엔진이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출연연이 대한민국 기술주권을 지키는 최전선에 서야 할 때다. 이것이 곧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