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영 사단법인 세계골프지도자협회 이사장
최근 필자의 사업과 협회 업무를 자문해 주시는 행정사가, 집필한 장편 소설 한 권을 보내줬다. 침대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다, 책상에 고쳐 앉아 밤새워 읽었다.
‘남쪽에서 뜨는 달’이라는 이 소설은 단순한 창작이 아니었다. 이는 저자의 부친이 병상에서 6개월간 손으로 쓴 수기를 바탕으로, 그 아들이 30여 년에 걸쳐 정리하고 퇴고해낸 실화를 기반으로 한 창작이었다.(현재 그 육필수기는 전쟁기념관 ‘6.25전쟁 아카이브센터’에 소장되어 있다.)
우리는 종종 역사를 위에서 아래로 바라본다. 대통령의 연설, 장군의 회고록, 기업인의 자서전이 서점가를 장식한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는 땅에 뿌리내린 민초들의 삶 속에 있다. 그들은 말이 없었고 기록하지 않았기에 우리의 역사에서 너무도 쉽게 잊혀졌다.
‘남쪽에서 뜨는 달’은 그 잊힌 이름 없는 아버지들의 삶을 다시 불러낸다. 전라도 강진과 월출산을 배경으로,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 전쟁, 산업화의 회오리를 지나온 한 남자의 삶이 펼쳐진다.
책 속의 인물들은 실존 인물이다. 꾸밈도 과장도 없다. 언어는 구수하면서도 절절하고, 때론 무기력하면서도 굳세다. 가난한 살림에 논밭을 일구고 때로는 전쟁터로 끌려가며 다시 집으로 돌아와 가족을 지켜낸 한 남자의 여정. 그 여정 속에는 이념도, 대단한 사상도 아닌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낸 삶의 진실이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대목은 일본 나가사키에 존재했다는 ‘조선인 환국 대기소’에 관한 내용이다. 아직까지 어떤 역사서나 교과서에도 언급되지 않은 이 공간에 대해 저자의 부친이 겪은 경험을 통해 최초로 기록됐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크다.
행정사란 직업은 원래 사람들의 사연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일을 한다. 억울한 사람의 사정을 글로 풀어내고, 제도를 통해 구제받게 만드는 일이다.
그런 행정사가 자기 아버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창작했다는 사실이 새삼 의미 깊게 다가온다. 민원을 글로 썼던 이가 이제는 민중의 삶을 기록한 셈이다. 이는 단순한 장르의 변화가 아닌 우리 시대의 글쓰기 방식에 대한 전환이며, 기록을 통한 또 하나의 공익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의 실제 삶은 얼마나 기록되어있는가? 이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쪽짜리 역사를 살아가는 셈이다.
‘남쪽에서 뜨는 달’은 그런 점에서 하나의 지침이 된다. 누군가 먼저 시작해야 한다. 누군가 아버지의 삶을 기록하고, 어머니의 침묵을 꺼내 말하고, 할머니의 기억을 문장으로 엮어야 한다. 이 책은 그 출발점으로 손색이 없다. 단순히 잘 쓴 소설을 넘어, 이 시대가 다시 써야 할 진실의 방향을 가리킨다.
시대는 빠르게 흘러가지만, 글은 남는다. 그리고 때로 한 권의 책이 수십 년의 세월을 대신해 기억을 지켜낸다.
대한행정사회 수석부회장의 중책을 맡고 있는 중에도 이번에 작가로 데뷔해 임창진 작가의 ‘남쪽에서 뜨는 달’이 바로 그런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