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균 ETRI 기술창업실 책임연구원
지난 6월 이재명 대통령은 국회 첫 시정연설에서 "실용주의를 핵심 국정운영 기조로 삼겠다"고 밝혔다. 오직 실용정신에 입각해 경기회복과 경제성장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적절한 철학이라고 본다. 18세기 전후로 나타난 실학사상을 보면,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바탕으로 성리학적 교리에 머물지 말고, 현실 문제해결과 백성의 삶을 개선하자는 실천적 자세와 일치한다.
실사구시는 지금 우리 정부출연연구원에 가장 절실한 가치이다. 과거 산업화와 정보화 시대를 이끌었던 출연연은 한때 국가 성장의 기둥이자 핵심 성장동력 역할을 해왔지만, 오늘날의 지능화·초융합 시대에 그 존재 이유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다. 국민은 공공 연구개발(R&D)의 성과가 체감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기업은 연구결과물의 완성도 및 활용 가능성에 의구심을 갖는다. 정부 또한 출연연의 국가·사회적 실질 기여에 의문을 품고있다. 이는 연구의 방향 및 결과가 현실로부터 멀어졌다는 경고 신호로 볼 수 있다.
실사구시는 과학기술이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해야 한다는 공공성과 실용성의 철학이자, 공공 R&D의 정당성을 다시 세우기 위한 근본적 접근 방법일 것이다. 이제 출연연은 기술을 ‘개발하는 기관’에서 벗어나, 문제를 ‘해결하는 기관’으로 전환해야 한다. 기후위기·고령화 등 사회문제가 심화되고, AI·바이오·로봇 등 융합형 기술로 인한 기술경계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사회 현안에 대해 과학기술 기반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정부정책과 연결해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출연연의 새로운 미션이며, 공공기술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이에 실사구시형 출연연으로 재정립되기 위해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제안해 본다.
첫째, 실사구시형 ‘중형과제’가 확대돼야 한다. 대형과제는 규모에 비해 실질 성과 환류가 느리고, 소형과제는 응용성 부족과 확산의 파급이 작다. 중형과제는 단기·중기적 사회 현안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문제해결 중심으로 출연연의 실용성을 증명할 수 있다고 본다.
둘째, 시장수요와의 협력적 연구기획 구조 전환이 필요하다.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되 연구자의 창의성과 전문성이 발휘될 수 있는 협력적 연구기획 구조로 전환돼야 한다. 민간 협력도 강소·중견기업과 지역 산업계와의 파트너십을 강화해야 한다. 진정한 실사구시는 수요자의 목소리 속에서 완성될 것이다.
셋째, 연구성과 평가 체계 또한 재설계가 필요하다. 양적 지표를 넘어,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평가하는 ‘사회적 임팩트·사회적 가치창출’ 중심의 정성 평가가 강화돼야 한다.
넷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출연연의 자율성과 공적 책임이다. 경쟁·수탁과제 중심(PBS:Project Based System)의 운영 구조로는 중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연구를 기대하기 어렵다. 개별 연구자 중심의 각개격파형 과제로는 실사구시를 추구할 수 없고, 기관의 공적 역할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고 본다.
출연연의 실사구시는 단지 기술개발에 그치지 않는다. 국민의 삶을 바꾸는 기술, 정책의 바로미터가 되는 과학, 현장을 향한 발 빠른 자세야말로 출연연이 가져야 할 핵심가치이다. 실사구시를 단기성과로만 봐서는 안된다. 장기적 관점에서 사회적 가치를 축적하는 출연연의 모든 연구는 실사구시적 행위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 철학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전 연구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필요한 것이다. 실사구시의 정신 속에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출연연의 방향이 있다. 과학은 기술 그 자체를 넘어, 국민의 삶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가 돼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