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리 대전본사 편집부 차장 (부장 직무대리)
[충청투데이 최소리 기자] 오늘은 나의 애순씨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나의 애순씨는 1957년생으로 만 나이 67세가 되었다. 바다의 도시 부산에서 태어나 6남매 중의 넷째로, 두 딸 중에서는 막내로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애순씨는 그 시절의 다른 애순씨들처럼 자연스럽게 결혼을 했더랜다.
나의 애순씨도 100% 양관식 같은 남자를 만났으면 참 좋았으련만 나의 애순씨는 학씨 80% 관식 20%로 이루어진 남자를 만나 결혼했더랜다. 그렇게 부산에서 삼천포로 시집을 가 친척 하나 없는 타지에서 억척스러운 시집살이를 견뎌낸 애순씨는, 마침내 딸을 하나 얻게 된다. 그 후 애순씨와 학씨는 대전으로 상경하고 밤낮으로 일하며 모진 세월을 견뎌 천둥벌거숭이 같던 딸을 사회로 내보냈다.
그런데, 나의 애순씨는 촉이 참 좋았다. 제6의 감각이 있는 것처럼, 광례가 애순이를 살리고 애순씨가 금명이를 지켜낸 것처럼, 나의 애순씨도 나를 여러번 살렸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촉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애순씨는 하나밖에 없는 딸이 다칠까 초등학교 등굣길이며 하굣길을 항상 함께했고 ‘야자’를 해야했던 고등학교 때도 골목길이 어둡다며 당신은 항상 가로등 몇개 없는 20분이 넘는 그 컴컴한 거리를 걸어와 나를 데려가곤 했다. 품안의 자식이라고 애순씨는 항상 딸을 걱정했지만 딸은 그저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며 제멋대로 나돌았다. 심지어 성질머리마저 남편을 닮아서 당신의 남편과 맨날 부딪히던 ‘리틀 학씨’는 성인이 되자마자 취직을 했다며 짐을 싸들고 애순씨만 놔둔 채 서울로 휑하니 가버렸더랬다.
그런데, 이제서야 알아버렸다. 애순씨가 딸을 그렇게 아꼈던 이유를. 하나밖에 없는 딸이어서가 아니라, 애순씨가 나를 만나기 전 가슴에 묻은 아이가 있었다는 것을. 그랬기에 전전긍긍하며 키워왔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그래서 반성을 했고, 고향으로 돌아왔고, 성실하게 일하며 ‘웬만하면’ 일찍 귀가하려고 한다. 정말 별 것 아닌 일인데도 내가 곁에 있어 애순씨는 행복해한다.
혼정신성(昏定晨省)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저녁에는 잠자리를 봐드리고 아침에는 문안을 드린다는 뜻으로 자식이 부모를 살핀다는 뜻이다. 성실하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여 애순씨를 살피는 일이 현대적인 ‘혼정신성’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밤 늦게 하교하는 고등학생 딸을 매일 데리러 왔던 애순씨처럼 이제는 내가 애순씨를 아침 저녁으로 돌보며 효를 다할 차례다. 나의 애순씨가 건강하게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 지 모르겠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디 나의 애순씨가 건강하게 나와 함께 오래있어주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