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렬 청주대·한국음식인문학연구원장

고향 마을에는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던 무렵에 세워진 120년을 훌쩍 넘긴 오래된 교회가 있다.

1900년대 초에 선교사들이 설립한 미션스쿨 고보의 졸업생이었던 조부께서는 이 고향교회 설립에 직접 관여하고 이어 목회와 청소년 교육활동을 펼쳤다.

자연스레 부모님과 우리 형제들 모두 대를 이어 교회를 다녔는데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기 전까지 나 역시 착하고 모범적인 하나님의 어린양이었다.

신도들이 직접 만들어 헌납한 방석 위에 모두가 무릎을 꿇고 드리는 예배는 성스럽기 그지없었고, 주일 전날에 까맣게 그을린 수십 개의 호야등 유리를 수세미로 깨끗이 닦는 수고로움도 선한 양의 임무로써 기꺼이 받아들일 만 한 일이었다. 늘 쑥스러워하긴 했지만, 이런저런 찬송에 맞춰 하는 율동이나 성경 암송도 좋았다.

겨울철이 시작되면 대부분 시간을 교회에서 보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공연할 성극과 어린이 성가대 찬송 준비를 위해서다. 당시만 해도 교회는 지금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기도하는 이기적인 집단이 아니었으므로, 교회의 성탄 전야 행사는 종교와 상관없이 인근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모이는 지역 공동체의 축제였다. 그래서 일 년 내 교회 한 번 안 나오던 이들까지 함께 모여 즐겼고, 교회는 성탄절에만 교회에 온 이들에게도 기꺼이 성탄 선물을 나누었다. 작은 성경책을 비롯하여 어린이들을 위한 학용품과 어른들을 위한 비누, 칫솔 등 여러 생활용품이 교회가 준비한 선물이었다.

무엇보다 특별한 성탄절 선물은 팥죽이었다. 음식 솜씨 좋은 어른 집사님의 지휘하에 이틀 전부터 새알심을 만들고 가마솥 몇 개를 동원하여 쑨 엄청난 양의 팥죽은 성탄절 당일 점심으로 내는 데, 성탄 예배에 참석한 이들은 물론 끝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넉넉하게 나누는 것이 관례였다. 동지라고 해도 제대로 된 팥죽 끓여 먹을 형편이 안 되었던 시골 사람들에게 붉은 팥과 새알심이 듬뿍 들어간 교회 팥죽은 일 년 중 먹은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고 특별한 음식이었다.

지금도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그때의 성탄절 교회 팥죽에 얽힌 에피소드들을 떠올리곤 하는데 오로지 팥죽을 먹기위해 딱 하루만 교회에 나왔던 친구는 그때 얘기가 나올 때마다 새삼 멋쩍어하곤 한다.

내게 팥죽은 벽사의 전통에 더해 권선징악을 믿고 정의를 추구하던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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