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오(1960~)

아이클릭아트 제공.
아이클릭아트 제공.

비가 오지 않아 마디가 짧아진 오이
지난밤 내린 비로 지네발 덩굴손이 자라고
구부렸던 순이 고개를 든다
옆으로만 퍼지던 오이 마디가 밤새 자랐다
덩굴손이 허공을 타고 길게 올라야
오이도 길쭉하게 주렁주렁 달린다

배밭 포도밭은 또 어떻구
한시름 놓은 거지
나무도 사람도
사십 밀리 비에 이렇게 달라지다니
논에 물이 차고 개울물이 흐르고
이제 살판난 거야
저수지까지 물이 괴면 좋으련만
하늘에 또 맡기는 수밖에

하하 웃으며 담배 한 대 물고
호박밭으로 향하는 해찬 형님
노란 오이꽃 토마토꽃이 옆에서
해맑은 얼굴로 웃는다

어느새 올해도 채 이십 일 남지 않았다. 매년 이맘때 이르러서야 우리는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다고 유수와 같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지난 여름 농부에겐 비가 오지 않아 마디 짧아진 오이를 보며 일일 여삼추로 안타깝던 순간 있었다. 그러다 가까스로 간밤 내린 비로 지네발 덩굴손이 자라고 구부렸던 순이 고개 들던 기쁨 있었다. 그 가파른 시간으로 일궈온 들녘에 지난 가을 풍작 이어졌다. 저 너른 들판 숨죽인 작물들 한순간 활력으로 살아나게 하던 비. 그건 고통의 순간을 살판으로 옮겨가는 거대한 수레바퀴다.

배밭 포도밭. 나무도 사람도. 사십 밀리 비에 확연히 달라지듯이. 우리 정치판도 그렇게 살판으로 출렁여봤으면. 영양가 없는 싸움으로 한해 마감하는 여야의 대결국면 일거에 털어버리고. 나라의 정치 올바로 서고 청년들 삶이 신바람으로 가득 차올랐으면. 우리 사회 더 젊고 건강한 살판 모습으로 꽃피었으면. 저수지에 차오를 물은 하늘에 맡기고 열심히 일하는 농부처럼. 여유와 진심을 감싸 안고 호박밭으로 향하는 마을 형님. 우리 작은 것 하나에도 정성을 다하며 오이꽃처럼 웃을 수 있었으면.

김완하(시인·시와정신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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