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훈 ETRI 스마트소재연구실 선임연구원

연구를 하다 보면 늘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는 질문이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연구가 과연 세상에 의미가 있을까?" 좋은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 것도 물론 보람이 있지만, 기왕 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일이라면 사회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 그래서 내가 전고체전지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이 길이 단순히 학문적 성취를 넘어 사회적 필요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전고체전지는 이름 그대로 전해질이 액체가 아닌 고체로 이루어진 차세대 전지다. 폭발 위험이 적고 안정성이 높으며 에너지 밀도를 기존 리튬이온전지보다 더 높일 수 있어 전기차와 에너지 저장 장치(ESS) 등에서 궁극적 해법으로 꼽히지만, 상용화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특히 액체 전해질을 대체하려면 고체전해질막이 기존 분리막처럼 얇고 유연하면서도 높은 이온전도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번에 필자가 속한 연구팀은 다공성 지지체 위에 고체전해질을 균일하게 형성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종이 한 장보다 얇지만 대면적 공정에 필요한 강도를 확보했고, 동시에 전지 구동에 필요한 이온전도성을 유지해 실제 산업 공정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연구 과정은 늘 이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필자가 연구하면서 가장 힘들다고 느끼는 부분은 단기 데드라인에 맞춰 성과를 내야 하는 현실이다. 연구는 본질적으로 가보지 못한 길을 가는 일이기에 수없이 실패하고, 때로는 멀리 돌아가야 할 때도 많다. 하지만 단기적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창의적이고 획기적인 시도는 점점 사라지고, 결국 "되는 연구"만 좇게 된다. 실효성 없는 결과물이 쌓이는 것은 연구자 개인에게도, 사회 전체에도 불행한 일이다. 최근 PBS 폐지를 계기로, 이제는 연구자들이 "되는 연구"가 아니라 "의미 있는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길 기대해 본다.

연구자의 길은 결국 평생 공부하는 길이다. 커리어 초반에 쌓아둔 지식만으로 평생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은 크나큰 착각이다. 시대는 계속 진보하고, 지금의 최첨단 기술도 어느 순간 기초 지식으로 전락한다. 그렇기에 연구는 단기 달리기가 아니라 장기 마라톤처럼 바라봐야 한다고 믿는다. 당장은 좋은 논문이나 취업을 위해 밤을 새우며 성과를 내야 하는 현실에 놓일 수 있지만, 긴 호흡으로 보면 결국 오래 달리는 사람이 강한 법이다.

2019년 노벨 화학상은 리튬이온전지(LIB) 개발을 이끈 세 명의 과학자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1980년대에 핵심 기술을 제시했고, 이를 토대로 한 세계 최초의 LIB가 1991년 소니에서 상용화되었다. 그러나 그 공로가 연구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기까지는 다시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연구는 체력 싸움이자 지구력 싸움이다. 연구실에서의 실패와 좌절은 끝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영화 A Million Miles Away에서 우주 비행사 Kalpana Chawla가 말하듯 "Tenacity is a superpower." 나 역시 그 믿음을 붙잡고, 세상에 의미 있는 연구를 오래도록 이어가기 위해 오늘도 실험 가운을 입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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