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춘희 대전문화재단 대표이사
비어있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 ‘공백’과 ‘여백’. 사전적 의미는 비슷하지만, 그 안에 담긴 온도와 결은 전혀 다르다. ‘공백’은 공허함과 무의미함을 연상케 하나, ‘여백’은 의도된 비움, 여유를 위한 공간이다. 같은 글자 수, 비슷한 구조이지만 글자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대전이라는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도 이런 ‘한 끗 차이’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시의 밤을 단순한 공백의 시간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어둠 속 무의미한 공허함일 뿐일 것이다. 하지만 이 밤이 예술과 상상력으로 채워지는 ‘여백’이라면,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과 감동을 품은 시간이 될 것이다. ‘대전 0시 축제’는 도시의 밤을 바로 그런 여백의 시간, 여백의 공간을 만들어내고자 시작됐다. 깊은 밤 도심 곳곳에 펼쳐지는 공연과 체험, 전시와 퍼포먼스는 시민에게 예술이 주는 따뜻한 울림을 선사한다.
지난해 200만명이 함께 즐겼던 축제는 올해 더욱 풍성한 콘텐츠로 돌아온다. 그 중심에는 대전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패밀리테마파크’가 있다. 내달 2일부터 16일까지 옛 충남도청사에서 펼쳐질 테마파크는 온 가족이 함께 예술을 체험하고, 놀이로 소통하며, 추억을 쌓을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꿈씨패밀리’가 이끄는 창의력 가득한 콘텐츠와 다양한 예술 프로그램, 체험존은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특히 올해는 무더운 여름을 식혀줄 도심 속 모래사장과 꿈돌이 언덕, 감필라고 정원 등이 조성되며 야간에 펼쳐지는 빛과 음악의 퍼포먼스 등 낮과 밤이 모두 살아 숨 쉬는 예술공간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특히 올해는 현대 예술뿐 아니라 우리의 뿌리를 느낄 수 있는 전통문화 콘텐츠도 함께 펼쳐진다. ‘2025 전통문화마당’에서는 무형유산 줄타기와 웃다리농악, 판소리 그림자 인형극 ‘와그르르르 수궁가’ 등 아이와 어른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전통 공연이 예정돼 있다. 이처럼 축제의 여백 속에 전통이 살아 숨 쉬며,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감동의 순간들이 펼쳐질 예정이다.
일각에서는 여전히 축제를 불필요한 소란이나 낭비로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도시에 바라는 것은 단지 효율과 생산성만이 아니다. 늦은 밤, 공연을 보며 아이의 손을 꼭 잡은 부모의 눈빛, 거리에서 처음 만난 이들과 함께 웃음을 나누는 순간들. 삶의 틈에 스며드는 예술의 여백, 가족과 친구, 이웃과 함께하는 소중한 경험이야말로 도시를 더 따뜻하고 활기차게 만드는 진짜 힘이다.
0시는 하루의 끝이자,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다. 어두운 도시의 공백을 환한 여백으로 바꿔가는 시간, 대전 0시 축제는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고자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한 글자의 전환, ‘공백’을 ‘여백’으로 바라보는 시선일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