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귀빈 의전활동·통역 등 담당… 도우미 700명 엑스포장 살림 도맡아
전국 관람객 하루 최대 22만명 방문… 수십명 미아 찾아주며 보람느끼기도
국민 공모로 탄생한 신조어 ‘도우미’… 고유 의미 퇴색 의미 변질 안타까워
‘우물안 개구리’ 당시 대학교 1학년… 넓은 세상·다양한 삶의 방식 경험해
대전엑스포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길
[충청투데이 권혁조 기자] ‘1993년 대전 엑스포’가 치러진지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대전 엑스포는 대전 시민의 염원과 전 국민의 성원이 담긴 국제적인 행사로 대전을 넘어 전국을 뜨겁게 달구며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여기에는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꽃’보다 빼어난 미모와 훌륭한 진행 솜씨로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이끈 도우미들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충청투데이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1993 대전 엑스포에서 ‘꽃’으로 활동했던 류승미(48) 씨를 만나 당시 대전 엑스포의 열기와 변화한 대전의 모습에 대해 들어 보는 시간을 갖는다.
- 대전 엑스포가 30주년을 맞았다. 소회는.
"대전엑스포는 역대 엑스포(인정박람회) 사상 최대 규모인 108개국, 33개 국제기구, 국내 200여개 기업이 참가, 93일동안 행사장을 찾은 관람객만 1450만명에 이를 정도로 요즘 말로 ‘초초대박’ 국제행사였다. 엑스포 폐막 이후 700여명의 운영 도우미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줄곧 대전에서 지내며 한빛탑과 엑스포 다리를 지켜 봐왔다. 엑스포를 기념하기 위해 개장했던 꿈돌이 랜드와 최첨단기술을 선보였던 상설 전시관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백화점과 고층 아파트들로 채워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30주년이라고 해서 특별한 소회를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타지에서 오랜만에 대전을 방문하는 도우미 동우회분들은 엑스포 행사장이 상전벽해 한 모습을 보고 놀라움과 동시에 아쉬움을 말하곤 한다. 파리 에펠탑은 1889 파리 엑스포에 전시할 목적으로 세워진 것으로 130년이 넘는 세월동안 파리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잡았다. 한빛탑도 앞으로 수 백년 이상 대전시민 곁에 남아, 시민들이 대전 엑스포를 좋은 추억으로 기억할 수 있는 행운의 마스코트로 오래도록 자리하기를 희망한다.
-당시 도우미로 활동하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점은.
"엑스포 조직위원회에서 뽑은 700여명의 운영 도우미는 엑스포장 전체의 살림을 도맡아 하며, 남녀노소 내·외국인 관람객이 입장하는 순간부터 퇴장하는 순간까지 ‘1일 엄마’와 같은 역할을 했다. 또 108개국에서 온 국내외 귀빈의 의전활동과 통역을 담당했고, 신문·방송매체를 통한 홍보활동뿐 아니라, 연예인 홍보인단과 전국 각지로 대전엑스포 홍보쇼케이스 활동을 다니기도 했다. 하루 평균 15만명, 최대 22만명까지 전국에서 온 관람객들이 모인 만큼 수많은 해프닝도 있었다. 특히 90만평이나 되는 넓은 전시회장에서는 매일 수십 명의 미아들이 발생했는데, 우는 아이들을 보살피다가 부모님을 찾아주는 일은 언제나 가슴 뭉클한 보람이 있었다. 또 다른 추억으로는 엑스포 기간동안 전국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소풍을 오고, 휴가 나온 군인들도 엑스포를 찾아 행사장은 늘 학생들과 군인들로 만원이었다. 이런 날은 행사장 내에서 다섯 발도 이동하기 힘들었다. 도우미들과 기념 사진을 찍으려고 학생들과 군인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엑스포를 찾았던 분들께서 당시 찍었던 기념 사진을 보면 아마도 수많은 나와 함께하고 있을 것이다.
-대전 엑스포에서 ‘도우미’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하지만 이후 부정적인 의미로 변질된 면도 있는데 도우미의 정확한 뜻은.
"도우미는 엑스포조직위원회에서 국민 공모를 통해 선정한 신조어로 ‘관람객을 도와주고 불편을 해결해주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의미다. 도우미는 당시의 인기가 이어져 그 용어까지 지금도 ‘보통명사’로 사용하고 있는 30년이나 장수한 스테디셀러 용어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도우미라 하면 ‘노래방 도우미’가 먼저 떠오를 만큼 처음에 가졌던 고유 의미가 퇴색하고,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가 됐다. 이로 인해 명칭 선정 후 바로 도우미라는 용어를 상표등록했으면 하는 후회는 엑스포 관계자들이 지금까지도 줄곧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특히 요즘 젊은 세대들은 원 뜻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 더욱 안타까운 심정이다. 1993년 세계적인 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주역들의 이름이며, 30년이나 장수한 옛 이름인 만큼 ‘도우미’의 원뜻에 부합하는 적절한 사용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엑스포 이후 도우미들의 정기적인 모임·활동은.
"700여명의 도우미 중에 대전·충청이 연고인 도우미는 100명도 되지 않았고, 전국 각 지와 해외에서 온 도우미들이 대부분이었다. 엑스포 폐막 이후 한자리에 모일 엄두를 내지 못하던 차에, 2005년 대전·충청지역을 근간으로 도우미 동우회를 결성했다. 이후 올해로 25회를 맞이하는 대전의 대표적인 과학체험 행사 ‘사이언스 페스티벌’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지속했다. 연말연시에는 도우미 총회를 통해 연말연시 불우이웃돕기, 소아암 환자돕기 등 뜻 깊은 봉사활동 단체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이러한 활동을 10여년 이상 하다가 동우회는 자연스럽게 해산됐고, 지금은 비공식적으로 친목을 도모하는 대전 모임이 남아있다."
-도우미 경험이 삶에 미친 영향은.
"당시 대학 1학년, 93학번이었기 때문에 엑스포 이후에는 조용히 학교로 돌아와 학업에 전념했다. 도우미 경험은 다른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다른 나라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는 실재(實在)를 실제로 경험, 이후로는 현미경이 아니라 망원경을 선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영화 ‘부시맨’을 보고 탄자니아에는 콜라병을 든 원주민만 있을 줄 알았는데, 엑스포 국제관에서 정장을 입은 탄자니아인을 만난 뒤 탄자니아가 아프리카 4위의 천연자원 보유국임을 알게 됐고, 요즘처럼 아메리카노가 흔하지 않던 1993년, 콜롬비아 국제관에서 풍겨 나오던 콜롬비아 원두 향기는 수 많은 관람객들을 줄 서게 만들었다. 대학 1학년 때 안정적인 직장을 준비하려고 들어갔던 고시원 앞 서점에 붙어있던 도우미 채용공고를 보고 우연히 응시했지만 93일간 도우미 활동을 통해 다양한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우물안 개구리가 넓은 세상과 다양한 삶의 방식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성장스토리가 된 셈이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은.
"경험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응답하라 1988’ 드라마가 전 국민에게 88년도의 향수를 불러일으킨 것처럼, ‘1993 대전 엑스포’도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길 기대한다. 현재 부산시와 한국공항공사가 2030년 부산엑스포 유치를 위해서 힘쓰고 있다고 들었다. 이미 우리나라는 1993 대전엑스포, 2012 여수엑스포, 두 번의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치뤘다. 2030 부산 엑스포도 단순한 지역 행사를 넘을 수 있도록 전 국민의 관심과 응원이 부산으로 모아지기를 두손 모아 바라본다."
권혁조 기자 oldboy@cctoday.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