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주 뉴스플랫폼 부장

사진=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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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투데이 김윤주 기자] ☞또 선생님 한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 그것도 우리 지역, 우리 동네에서 말이다. 모든 것이 충격적인 일이었다. 동네 전체는 장례식장이 됐다. 선생님이 근무하셨던 학교 두 곳엔 하얀 화환이 길게 늘어섰다. 선생님은 일부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4년간 시달리셨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학부모들과 ‘한 동네’ 살며 많은 괴롭힘을 당하셨다고 한다. 그들은 선생님과 우연히 마주치면 모욕적인 언행을 일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선생님은 그 학부모들을 피해 옆 동네 마트까지 다니셨다고 한다. 아마 선생님껜 내가 사랑한 이 동네가 ‘지옥’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의 발인날 학교에 갔다. 슬퍼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분노하는 사람들 또한 참 많았다. 선생님의 운구 차량이 학교로 온다는 소식에 인파가 운동장에 모였다. 검은 물결이 원을 그렸다. 운구 차량이 운동장을 두 바퀴 돌았다. 교단에 서 계셔야 할 선생님이 누워 계셨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가득해야 할 운동장엔 어른들 통곡 소리가 가득했다. 유가족의 절규를 듣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선생님도 누군가의 가족이었다. 교사이기 전에 누군가의 딸이었다. 누군가의 아내였다. 누군가의 엄마였다. 그리고 누군가는 세상을 잃었다.

☞선생님의 ‘침묵’은 그 누구보다 큰 목소리가 됐다. 많은 게 드러났고 또 많은 걸 고쳐야 했다. 잃고 나서야 움직이는 이 세상이 원통했다. 선생님이 도움을 바랐을 땐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교권보호위원회를 열어달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학교의 보호는 없었다. 혼자 싸워야 했고 혼자 감내해야 했다. ‘학교’ 안에서 일을 하다 생긴 일임에도 말이다. 대부분의 학교 관리자들은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는다. 일명 ‘보신주의’다. 덮으려 하고 막으려 할 뿐이다. 설령 ‘악성’ 민원인이 선생님을 괴롭혀도 마찬가지다. 난리 치는 학부모 대신 참아야 하는 선생님을 꺾을 뿐이다. 수많은 아이들에게 ‘책임’을 가르치는 곳임에도 정작 학교는 ‘책임’을 모른다.

☞선생님은 오랫동안 괴로워하셨다.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묻어둘 뿐이다. 상처의 조각은 일련의 사건들로 다시 뾰족해져 선생님을 아프게 했을 것이다. 바뀌지 않았으니 지키지 못했다. 화환에 있던 한 문구가 기억에 남는다. ‘운이 좋아 아직 살아 있는 교사들 일동’. 선생님들을 더 이상 잃을 순 없다. 교권보호 법안이 필요한 이유다. 학부모의 각성 또한 필요하다. 선생님은 내 아이의 스승이다. 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런 선생님을 되레 가르치려 드는 것은 ‘모순’이다. 그렇게 대단한 학부모라면 아이를 ‘홈스쿨링’으로 가르칠 것을 추천한다. 영원히 당신보다 뛰어난 선생은 만나지 못할 것이다. 학교·학원·유치원·어린이집 등 모든 교육기관에서 ‘학부모 갑질’은 사라져야 한다. 학부모가 ‘선생님의 선생님’이 돼선 안된다.

김윤주 뉴스플랫폼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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