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도록 바꾸고 싶었다.교과서라는 '관'에 갇혀 생기를 잃은 지식과 교실이라는 '감옥'에서 끊임없이 겉돌기만 하는 교수와 학생. 분명 교수는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학생들은 듣지 않고 있었다. 교수의 입을 떠난 '진시황'과 '임진왜란'은 학생들의 귀에 도착하지 못한 채 공중분해돼 알 수 없는 지식의 신음소리만이 교정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70~80년대의
'좋아함'과 '사랑'은 엄연히 다르다.대상이 미(美)의 절정에 있을 때보다 고뇌(苦惱)의 바다에 빠져 있을 때 더욱 가까이 있는 것이 곧 사랑이다.고뇌에 빠져 있을 땐 대부분 푸석푸석하고 초라해지기 마련인지라 좋아했던 사람도 한마디 위로의 말만 남기고 그냥 떠나버리기 일쑤다.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그 초라함을 나의 초라함으로 체험하는 동시에 한
심술궂은 봄바람이 꽃잎을 흔들 때마다 밤새 내려앉은 이슬이 후두둑 텃밭에 떨어진다.하루가 다르게 훌쩍 커 버리는 봄나물들은 텃밭이 비좁은 듯 아침 해가 뜨자마자 기지개 켜기에 바쁘다.증조할머니가 증손자 대학 보낸다며 굽은 허리를 또 다시 품팔아 심어 놓은 채소들, 열살배기 충석이가 대학가려면 뒷동산 높이만큼 쌓여야겠지만 충석이는 동생 다희(6)의 군것질거리
왜소하지만 단아하다.오히려 강함과 부드러움이 함께 배어 있다는 것이 정확하다.검은 옷을 즐겨입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은 모습, 사무적인 말투에 보일 듯 말 듯 절제된 미소가 '교육계의 철녀(鐵女)'란 애칭을 짐작케 한다.1961년 교직에 첫 발을 내딛고, 명함 한 귀퉁이에 동부교육장이란 직함을 들여 앉히기까지 40여년.짧지 않은 세월이지만 별무리없이 순탄
"간첩이야!"뒤통수를 후려치는 외마디 소리에 조사팀은 깜짝 놀라 멈춰섰다.간첩이 출몰했다고? 아직 조사일정은 4일이나 남았지만 여기 첩첩산중에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서둘러 장비를 꾸려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게 급선무다. 산림 생태 조사팀장 김관수(金寬洙·당시 66세) 교수가 3명의 대학원생들을 데리고 5㎞는 족히 떨어진 인근 마을로 내려갈 채비를
염홍철 대전시장이 양복 대신 정열의 자주색 유니폼과 운동화로 무장하고 탐탐이(서포팅 때 치는 북의 일종)를 들쳐 멨다.서로 반목했던 시의원들이 2인 1조가 돼 휴지폭탄(두루말이 휴지를 말아 던지는 서포팅 용품)과 홍염(붉은 빛을 내는 폭죽의 일종)을 만든다.돈이 많든 적든, 무슨 직업을 갖고 있든 상관없이 경기장에 모인 시민들은 브라스밴드의 '섭팅곡'(서포
아지랑이 피어나는 봄 대학 캠퍼스 한 켠, 신세대들 사이에서 왜소한 체구의 교수가 강연에 한창이다."엉은 1이고 뒈는 2, 투아는 숫자 3입니다."아라비아 숫자 뗀 지 10년은 넘었을 대학생들에게 프랑스 세계의 숫자를 가르치고 있다.한번 들으면 기억할 법한데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치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수업을 끝낸 그에게 한 학생이 다가선다."교수님 당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한여름.독일 바이에른 주 뮌헨의 시내 한복판 저녁 러시아워 왕복 6차선 도로 위에 한 택시가 갑자기 선다.택시운전사는 비상등을 켜고 내린 후 자기를 향해 쏟아지는 빗물과 차량 행렬들의 경적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그리고 천천히 "부인, 내리시지요. 모셔다 드릴 수가 없네요"라고 또박또박 말했다.40대의 승객은 갑작스럽
코흘리개 시절, 흙먼지나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처음 만났다.호기 어린 마음에 힘껏 차 올린 축구공은 파란 하늘을 머금은 채 소녀의 마음을 빼앗아갔다.450g의 작은 공은 어느덧 숙녀가 된 그에게 인생으로, 꿈으로 자리잡았다.여성축구 클럽 '나누미 여성축구단' 코치 홍택희(26)씨는 대전 유일의 여자축구단 코치이자 대전 유일의 여성 국제심판이다.어릴
"원장님, 이런 거 꼭 해야돼요?"침대에 환자복을 입고 어색하게 누워있는 한 중년 간호사는 대학시절에나 했을 법한 환자체험에 짜증이 난다.그러나 군인처럼 꼿꼿해 보이는 원장이 지켜보고 있어 꼼짝 않고 후배 간호사가 찔러대는 주사기에 몸을 맡겨야 할 형편이다.원장이 바뀐 이후 의료원에서는 친절교육, 휠체어 체험, 붕대감기에다 별도로 환자와의 대화의 시간을 갖
'핏줄이닷….'잉크 묻은 펜 속에 일상이 넘쳐난다.몇 번씩 마주쳤을 이야기들은 문사(文士)의 손 끝에서 정제된 글귀로 종잇장에 내리 앉는다.시상(詩想)이라야 엄숙하지도 그렇다고 현란한 기교도 없다. 하늘 아닌 땅을 밟고 바라본 나와 이웃들이다. 지난 91년 즐거운 일탈을 찾던 몇몇 20대 청년 문학도들은 그렇게 문학동우회 '문청기르마'를 세상 밖에 내보였다
심장이 터질듯한 격렬함이 온 몸을 휘감는 순간.'샤먼'(shaman)의 심장들은 100m를 14초에 막 완주했을 때 느끼는 숨막힘과 극도의 갈증을 훌쩍 넘어 온 몸을 가능한 모든 각도로 빠르게 가누어야 하는 파워 재즈의 강한 비트 속으로 또다시 미끄러져 쿵쾅거린다.밤 11시 대전시 동구 용전동 뉴스 나이트 클럽.3인조 라이브 여성 DJ팀 '샤먼'의 등장으로
색소폰 선율이 잿빛 조명에 흘러내린다.보조라야 컴퓨터 반주가 전부지만 정직한 음색을 이리 저리 조율하는 것은 그의 능력이다.사람들 술잔 속에 흥을 돋구는 '딴따라 인생'.그의 애달픈 사모곡이 시작됐다.재즈 아티스트 윤민호(57·동구 판암동)씨는 오늘도 3평 남짓한 무대 인생을 풀어놓는다.자욱한 담배연기가 짓누르는 곳이지만 그의 색소폰 음(音)은 취객들의 시
노경성(盧京星·35)씨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어제 분수를 통분하지 못해 불안해하던 한 학생이 자습실에서 혼자 수학문제를 풀고 있다.방법은 알려줬으니 답을 찾는 것은 아이의 몫이다.수학은 세상사와 달리 정답이 하나뿐이기에, 아무리 복잡해도 끝이 분명한 법이다.학교에서 수학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중학생들을 위해 2년째 수학 클리닉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노씨에
"효임씨 덕분에 제2의 인생을 얻었어요. 평생 잊지 않을게요."김효임(金孝姙·43)씨는 마리아(가명) 언니가 3개월 동안 누워 있던 이부자리를 개던 중 곱게 접어놓은 편지를 발견했다.세상의 끝에서 아무 희망도 없었던 자신을 위해 부모보다도, 남편보다도 더 큰 사랑을 아무런 대가 없이 줘 너무 고맙다며 글자 하나 하나에 눈물을 담아 써 놓은 편지였다.효임씨도
충남대 병원 65병동. 병마(病魔)가 뼛속 깊이 뿌리내렸지만 입가에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민주화 시위와 최루탄 속을 누비며 움켜쥔 주먹을 치켜들던 그녀에게 환자복과 링겔병을 달고 다니는 모습은 왠지 어색하다.중학교 교사에서 세무사로, 그리고 사회운동가로….50줄 인생 대부분을 민주화에 묻어버린 강철 여인이었기에 병문안 온 지인들은 그녀의 낯선 모습에
태백산을 오르는 박용신(65)씨 일행이 한계에 부딪친다.5명의 일행 가운데 하나둘씩 산행을 포기하고, 이제 남은 건 둘뿐이다.새벽공기가 어지간히 매섭고 벌써 2시간째 몰아치는 강풍때문에 무슨 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을 넘어 두려움마저 든다.그러나 박용신씨는 리노프 카메라를 가슴에 꼭 안고 정상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는다.중간에서 포기하거나 날씨가 나빠져
사진 속에 한 소방관이 지친 모습으로 서 있다.화마(火魔)와 끈질긴 사투였음을 보여주듯 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다.목까지 차오르는 갈증으로 PT병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소방관의 모습에 보는 이 또한 갈증을 자아낸다.사진작가 백명자(51·대전 중구 태평동)씨. 그녀는 화재 현장과 그 주위의 긴박한 숨결을 담는 화재 전문 사진가다.고운 외모만 보면 불길을
"6개월 남았어요."담당의사의 사형선고와 다를 바 없는 위암진단이 내려진 지난 73년. 이순구(李舜求·63)씨는 뒤늦은 반성을 했다.술로 탕진했던 세월, 교사라는 본분을 잊은 수많은 행동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쳤다.젊은 시절 무수한 육체적·정신적 병을 달고 살았다.위궤양, 위하수, 담낭암 그리고 우울증과 신경쇠약, 공황장애 등이 그를 끝도 없는 인생의
억겁(億劫)의 잡념이다.세속의 때를 벗어던지지 못하니 부처의 세계는 허상일 뿐이다.초동(草童)의 눈에 화려하기만 하던 단청은 하늘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을 넘긴 지금, 인간 생로병사가 담겨있다.산사(山寺)에 색을 입히는 '단청장이'. 대전시 지정 인간문화재 단청장 이정오(55)씨의 붓끝은 무념(無念)에 이르러서야 움직인다. "단청의 화려함은 극락세계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