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시절은 가도… 색소폰은 나의 人生

색소폰 선율이 잿빛 조명에 흘러내린다.

보조라야 컴퓨터 반주가 전부지만 정직한 음색을 이리 저리 조율하는 것은 그의 능력이다.

사람들 술잔 속에 흥을 돋구는 '딴따라 인생'.

그의 애달픈 사모곡이 시작됐다.

재즈 아티스트 윤민호(57·동구 판암동)씨는 오늘도 3평 남짓한 무대 인생을 풀어놓는다.

자욱한 담배연기가 짓누르는 곳이지만 그의 색소폰 음(音)은 취객들의 시선을 끌어 당긴다.

거친 듯하면서도 때론 숨죽이며 청중들의 감흥을 끌어올린다.

그만의 개성이 능수능란한 기교와 맞물려 앙상블을 이룬다.

재즈 무대란 점이 더욱 그렇다.

자그마한 체구인데도, 잦아드는 듯한데도 느낌은 폭발적이다.

가끔 술 취한 취객이 무대로 올라와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른다.

때론 다른 손님들의 질타에, 때론 종업원의 손에 이끌려 취객의 반란은 진압되지만 정작 연주하는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 찬다.

낭만을 알고, 사람의 살가움을 알기 때문이다.

"재즈는 거칠죠. 불규칙하고 반항적인 음도 많이 사용됩니다. 많은 테크닉이 필요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꽤 격정적인 듯하지만 한 곡이 끝날 때쯤이면 편안함을 느끼게 하죠."

과거 그는 전국구 색소폰 연주자로 이름을 날렸다.

서울과 부산 등 대형 특급호텔의 행사란에는 어김없이 그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화려한 상들리에와 곱게 단장된 무대, 제법 난다하는 가수들 뒤엔 그의 연주가 있었다.

'오동잎'을 부른 최헌과 같은 클럽에서 일했고, 영원한 젊은 오빠 조용필도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당대 최고였던 길옥윤 악단과 이봉조 악단, 윤항기의 키브러더스에서 연주자로 활동했다.

'날개'의 허영란은 자신이 꾸린 악단에서 키워낸 인재다.

젊은 객기에 떠난 고향이었다.

음악을 좇아 고교 졸업장을 받자마자 도망치듯 대전을 떠났고, 서울을 내 고향인양 살았다.

당시 야인 음악가들에게 최고의 선망 대상인 미8군부대, 동두천, 용주골, 선유리, 부평 등에서 자리를 잡았다.

"무수한 경쟁률을 뚫고 미8군에 들어갔죠. 당시 미8군은 정통 클래식이 아닌 야인 음악가들에게는 최고의 선망 장소였어요. 그만큼 1년마다 재시험을 치렀고 AA등급부터 A, B, C, D등급까지 구분돼서 관리가 됐죠."

그는 A클래스였다.

실력만큼은 입증받았다.

객지생활만 25년.

남부러울 것 없던 그가 화려함을 버리고 지난 88년 고향을 찾은 데는 이젠 같이 늙어버린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

백발이 돼 돌아본 대전은 살붙이였다.

음악에 미친 양반 집 장남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재즈 음악을 좋아했죠. 돈이 생기면 음반 사러 은행동 레코드 가게 가는 게 일과였으니까요. 고교 졸업하자마자 음악을 찾아 떠난 곳인데…."

끝말을 맺지 못한다.

늦깎이 효도에 밴 아쉬움과 속죄가 묻어 난다.

저녁 8시부터 시작되는 하루 일과다.

50줄 넘긴 나이지만 업소 4곳을 다닌다.

30분 연주 후 부리나케 짐을 싸고 또 다른 곳에서 짐을 풀어놓는다.

그래도 고향이라선지 떠돌이 설움은 없다.

밤 11시가 돼 마지막 업소 공연을 끝낸 후 곧장 집으로 향한다.

어머님을 찾아서다.

그는 해방 직후 대전 대흥동에서 태어났다.

제법 유복한 집안인 덕에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결국 취미삼아 알음알음 듣던 음악이 그의 인생이 됐다.

"중학교 2학년 때였죠. 대전극장에 길옥윤 악단이 음악공연을 왔죠. 어린 마음에 숨 죽이며 듣던 그 재즈 음악이 얼마나 마음을 사로잡던지 순간 매료됐죠."

밴드부가 있던 대전상고에 진학했다.

당시 밴드부 4기.

지금도 유명한 밴드부 기강이 시퍼럴 때다.

조금이라도 틀리면 선배들의 불호령과 함께 매타작이 있었다.

밤새 연습에 연습, 집에서는 방음을 위해 이불로 창문이며 방문 틈을 막아놓고 연습했다.

너무 힘들었다.

그만 둘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 때마다 든든한 후원자가 돼준 분이 바로 어머니였다.

재즈 음반을 틀어놓고 따라하는 연습에 어머니는 옆에서 스피커 음을 조절해 주셨다.

소리가 작아지면 작은 음으로 연주했고, 스피커 음이 커지면 높고 긴 음을 내뱉었다.

어머니가 옆에서 힘이 돼 준 반면 부친의 반대는 매우 심했다.

당시 공직자이던 부친에게 집안 장남이 이상하게 생긴 서양악기에 매달린 꼴은 못볼 노릇이었다.

고교 졸업장을 받고 도망치듯 서울로 갔을 때도 음악 하나 믿고 가족을 버린 셈이다.

정신적인 지주였던 이봉조씨가 지난 88년 세상을 등졌을 때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고 뒤돌아보기까지는 꼬박 '젊음'이란 시간을 대가로 치렀다.

많은 것을 얻었지만 또한 많은 것을 잃었음이다.

늙은 악사가 병으로 노쇠한 어머니의 곁을 지키는 것도 외면했던 것에 대한 뒤늦은 돌아봄이다.

최근 재즈가 일반인들에게 많이 보급되면서 방송 출연과 각종 페스티벌 참가 요청이 잦아졌다.

지난해에는 남경에서 열린 중국 남경 국제 재즈 페스티벌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녹화나 생방송이 있는 날이면 자랑삼아 어머니께 보여 드리지만, 정작 어머니는 방송보길 꺼리시죠. 제가 땀을 흘리며 연주하는 모습이 안쓰러운가 봐요. 간혹 보실 때도 눈물을 흘리십니다."

수십년 동안 전국을 휘돌다 이제 고향에 안착했다.

뒤늦게 철이 든 것일 수도 있지만, 어린 시절 스피커음을 조심스레 조절하던 어머니의 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사모곡을 부른다.

황금빛 색소폰을 손에 쥔 늙은 악사의 얼굴이 맑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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