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매력에 푹 빠졌죠"

태백산을 오르는 박용신(65)씨 일행이 한계에 부딪친다.

5명의 일행 가운데 하나둘씩 산행을 포기하고, 이제 남은 건 둘뿐이다.

새벽공기가 어지간히 매섭고 벌써 2시간째 몰아치는 강풍때문에 무슨 변이나 당하지 않을까 걱정을 넘어 두려움마저 든다.

그러나 박용신씨는 리노프 카메라를 가슴에 꼭 안고 정상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는다.

중간에서 포기하거나 날씨가 나빠져 정상에서 급히 내려오는 등산객들을 마주칠 때마다 박씨는 더욱 흐뭇하다.

'드디어 사람 발자국 하나 없는 온전한 자연 그대로를 찍을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 때문이다.

4시간이 지나서야 드디어 정상에 올랐을 때, 눈앞에 펼쳐진 설경은 박씨의 숨을 멎게 했다.

사람의 자취가 범접하지 못하는 절대자연. 그가 그렇게 만나보고 싶은 모습이었다.

나도 몰래 리노프 617(대형 원판사진을 찍는 사진기)의 셔터를 계속 눌러댄다.

일주일 후 30통의 필름에서 건져낸 단 한 컷은 그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호는 사행(思行), 마음속에 정한 바를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박씨의 스타일을 꿰뚫어 본 어느 한학자가 10년 전 지어준 것이다.

실업계 고등학교 교사생활 30여년 만에 보건대학교 학장으로 발탁돼 5년간 독불장군으로 통했던 그다.

당시 일부 지연, 학연, 혈연에 근거한 학사행정을 '원칙'이라는 튼튼한 망으로 걸러내 학교를 건실화했다는 주변의 평가는 그를 '강성'이라는 이미지로 굳혀놓았다.

그런 그가 퇴직을 3년이나 남겨 놓고 돌연 사임, 사진찍기에 몰입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반신반의했다.

그토록 정열적으로 학교를 개혁하고자 했던 박 학장의 정열의 그릇이 그렇게 쉽게 비워질까가 '반의'였다면, 언제나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주위를 놀라게 하는 아이디어로 톡톡 튀는 그를 아는 사람들은 '반신'했다.

그가 '사람의 손길을 배제한' 사진찍기에 몰두한 것은 15년 전부터다.

실업계고 원예과 교사 시절, 아이들에게 꽃이름을 가르치기 위해 자료를 뒤적였지만 당시 꽃사진을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즉시 박씨는 월급의 3배가 넘는 라이카 카메라를 구입해, 꽃을 찍기 시작했다.

그때는 사진에 대한 매력보다는 가르침의 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는, 살아있는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원칙의 연장선상서 교사로서 느낀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진이 갖는 매력은 그를 휘감았다.

10여년 동안 틈만 나면 사진을 통해 세상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자연의 '정직함'과 접하며 그가 추구하는 세상의 모습을 가슴 속에 한컷 한컷 인화해 나갔다.

그의 사진을 통한 치열한 자기 충전은 그가 항상 원칙의 편에 서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게 하는 마음의 양식과 무기가 돼 줬다.

교사와 학장을 지내며 연간 학사행정을 챙기던 그의 손은 이제 니콘, 케녹스, 라이카 등 평생 모아온 6대의 카메라를 꼼꼼히 점검하고 렌즈를 정성스레 닦느라 바쁘다.

10평 남짓한 박씨의 사무실(사행 사진연구소)은 정오가 지나면 사진 동호인들, 후배들, 퇴직을 앞둔 친구들로 북적인다.

"박 학장, 자네 사진엔 사람냄새가 안나, 어째 사람이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 거지?"

역시 퇴직을 앞둔 한 친구가 50여페이지에 달하는 사행(思行)의 작품집을 넘기며 묻는다.

"사진은 이 세상 무엇보다 정직하지. 원칙과 정직이 통하는 세상이 사진에서는 100% 가능해."

"사람이 들어간다고 그 완벽함이 깨지기라도 하나?"

그는 대답 대신 그가 아껴온 '사계절'이라는 작품을 백발이 성성한 친구 앞에 내놓는다.

전북 완주군 한 시골마을에 우뚝 서 있는 100살이 훌쩍 넘은 소나무를 주제로 사계절 변화의 모습을 매번 똑같은 자리에서 찍은 네컷짜리 작품이다.

"와, 자네 이걸 언제 찍은 건가?"

"그동안 세상에서 발에 치였던 온갖 부정직함과 무원칙들… 그것들을 일순간에 침묵시키지 않나. 그걸 찍느라 꼬박 3년이 걸렸네."

최근 박씨는 그 때 그 친구와 태백산에 올랐다.

그가 가장 아끼는 리노프 카메라로 무장하고.

살을 에는 강풍을 몸으로 뚫는 것은 그들이 이제껏 살아 온 삶을 고스란히 축약해 내는 것 같다. 남들이 중간에서 내려가자고 했지만 그는 꿋꿋이 정상에 올랐다. 그곳에서 가졌던 평화는 뭐라 표현해 낼 수 없다.

사행(思行)은 60평생 일에만 빠져 살다 정작 자신을 위해 무엇을 투자해야 할 지 머뭇거리는 동년배들이 안타깝다.

"주변에서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은 잊은 채 일에 치여 살고 있어요. 사진의 정직함에 매료되기 전까지 나 스스로도 그런 모습이었죠. 그렇지만 너무 아깝지 않나요? 나를 기다려 줄 나만의 세계를 틈틈이 구축해 나가는 것. 자식을 잘 키우고 가정의 안정을 지키는 남자의 길에 꼭 병행돼야 할 인생의 필수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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