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한 역사교육' 김용범 나사렛대 교수

미치도록 바꾸고 싶었다.

교과서라는 '관'에 갇혀 생기를 잃은 지식과 교실이라는 '감옥'에서 끊임없이 겉돌기만 하는 교수와 학생. 분명 교수는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학생들은 듣지 않고 있었다. 교수의 입을 떠난 '진시황'과 '임진왜란'은 학생들의 귀에 도착하지 못한 채 공중분해돼 알 수 없는 지식의 신음소리만이 교정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70~80년대의 대학 분위기에서 김용범(47·나사렛대 교양학부) 교수는 '무언가'를 절실히 꿈꿨다.

그 절실함은 68회의 답사와 상식을 깨는 야외수업으로 이어졌다.

동아리를 교수가 직접 주도해 만드는 파격을 선례로 남기며 학생 속으로 파고 들었다.

아카데미 극장 한켠을 빌려 역사영화를 상영하며 수업을 진행하다 발을 밟은 학생이 부지기수요, 수업답사를 따라가겠다고 아우성치는 여학생들 때문에 일정표를 변경한 게 한두번이 아니다. 학생들은 '무언가'에 목말라했고, 그는 그 '무언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쯤되면 그가 무슨 '혁명가'쯤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그는 학생들을 선동하지 않는다.

다만 학생들 내면의 자발성을 충동질해 암기 위주 교육으로 역사불감증을 앓고 있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즐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뿐이다.

그 길을 걷고 안 걷고는 언제나 학생들의 몫이다.

"아니 무슨 입장료가 3000원이나 해요. 팔을 걷어붙이고 돈을 줘서라도 학생들에게 역사를 알리려 해도 모자랄 판인데. 입장료 따위로 학생들 답사를 막아요. 이게 말이 됩니까?"

60여명을 이끌고 고창 문수사를 찾은 김 교수의 언성이 높아졌다.

뒤따라 오던 학생들은 웅성웅성대며 돌아가는 분위기를 살핀다.

"저도 교수님의 뜻은 알겠지만 여기 원칙이 그런 걸 직원인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언성은 높아지고 '논리'에 밀린 직원은 주지스님을 불렀다. 주지스님과 30여분간의 대담이 오간 후 학생들은 3분의 1 가격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1998년 여름의 일이었다.

이후 6년 동안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했고, 이런 상황에서 김 교수는 언제나 '모 아니면 도'였다.

말이 안 통하면 그냥 발을 돌려 버린다.

그렇지만 문수사에서처럼 대화가 되는 주지스님은 좋은 벗이 된다. 지금은 절을 찾기 전에 학생규모와 방문시간 등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 '아기자기한 특혜'를 예약한다.

문수사, 예산 수덕사, 추사고택, 해미읍성, 남연군 묘, 해인사, 황산대첩비, 피바위, 식영정…. 얼핏 보면 안 가본 데가 없을 것 같지만 김 교수는 아직도 가봐야 할 곳이 많다고 주장한다.

짧게는 1박2일, 길게는 3박4일 일정으로 가는 답사는 4~7곳의 방문지로 짜여지니까 중복 부분을 빼더라도 최소 300여 곳 이상을 돌아다닌 셈이다.

방학답사 2회, 학기 중 답사 2회 거기에 일출답사 1회씩 1년에 5번의 동아리 답사에 자신의 수업을 듣는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답사 연간 4~5회씩, 김 교수가 걸은 거리만 따져도 지구를 한바퀴나 돌고도 남는다.

답사지를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김 교수의 몫이다.

30%는 유명세를 따라 짜지만 나머지는 유명하지는 않지만 경치가 좋고 재미있는 역사적 에피소드가 담긴 곳으로 구성한다.

그의 이런 답사원칙에는 이유가 있다.

"학생들이 나이가 들어 가정을 꾸민 후를 생각해 봐요. 어린 아이를 데리고 교육적 가치도 있으면서 조용히 머리도 식힐 수 있는 그런 곳에 가보고 싶겠죠. 하지만 경주 불국사니, 오대산 월정사·화엄사니, 유명한 곳밖에 생각이 안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럴 때 답사의 추억이 서려 있는 자기만의 유적지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사실이었다. 이번 스승의 날 걸려온 10년전 제자의 전화는 '행복한 생활의 발견'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는 것이었다.

"교수님, 이번 어린이날에는 전북 순창에 갔더랬어요. 옛날 교수님이 거기 땅이 왜 붉은지, 땅이 피로 물들어서 그렇다는 전설도 말씀해 주셨죠. 아이들과 들판을 걸으며 이 얘기 저 얘기 하니까 무척 좋아하더라구요."

참으로 보람된 순간이었다.

1989년 강단에 처음 서면서부터 과거와는 전혀 다른 수업방식을 추구했다.

그러나 학기 말에는 언제나 불만족이 엄습했고, 큰 기대를 안은 수강생이 900여명 넘게 몰릴 때는 자뭇 두렵기까지 했다.

야외수업에 현장답사, '당신이 진시황제라고 가정하고 폭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변명을 해 보라'는 식의 파격적인 시험문제는 보수적인 교단으로부터 견제를 받기도 했다. 너무 튀는 것 아니냐는 식의….

그렇지만 1997년 사이버상에서 시작된 '유적답사회'라는 동아리활동에 많은 학생이 몰리면서 김 교수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학생들의 열성에 힘입어 경쟁률이 거셌던 동아리방 유치도 이듬해 성공했다.

2000년 소속을 충남대에서 나사렛대로 바꾼 이후에도 동아리에 대한 열의는 변함이 없었다.

지난 10일에는 담양 대나무 숲을 거닐었다.

동아리 설립 이후 버스 2대를 꽉 채워 이동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쏴~, 쏴아~ 대나무 부딪치는 소리가 대봉대, 광풍각, 제월당의 정자와 돌담에 쓰여진 송시열의 글씨들을 쓰다듬으며 지나간다. 시원하게 뚫린 대나무 숲길 위를 잠시 멈춰서 재잘거리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본다.

언제나 바빴던 15년의 교직생활이, 중국을 14차례나 방문하며 실크로드를 혼자 거닐던 자신의 모습이 아이들 모습 위로 오버랩된다.

그리고 그는 느꼈다.

자신이 이끈 이 길을 학생들은 스스로의 판단과 느낌으로 걷고 있다는 것을.

오늘도 그와 그의 학생들에게 '답사의 추억'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