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문학계 "우리가 지킨다"

'핏줄이닷….'
잉크 묻은 펜 속에 일상이 넘쳐난다.
몇 번씩 마주쳤을 이야기들은 문사(文士)의 손 끝에서 정제된 글귀로 종잇장에 내리 앉는다.
시상(詩想)이라야 엄숙하지도 그렇다고 현란한 기교도 없다.
하늘 아닌 땅을 밟고 바라본 나와 이웃들이다.
지난 91년 즐거운 일탈을 찾던 몇몇 20대 청년 문학도들은 그렇게 문학동우회 '문청기르마'를 세상 밖에 내보였다.
시작(詩作)과 작품 수준에 제한은 없었다.
낙서가 시가 되고 공들인 작품이 졸작이 돼도 시인으로 느끼는 해방구에 만족한다.
이들을 묶어 놓은 목원대 불문과는 낭만과 자유에 덧붙여진 인연일 뿐이다.
문청기르마는 목원대 불문과 출신들만 모인 순수 아마추어 문학동우회.
겉보기엔 일반 문학동우회와 다를 것이 없다. 대학직원이 주축이 되고 학생들이 함께 따르고 있는 정도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예사 문학동우회와 규율부터 다르다.

시를 밥 먹듯 쓰지 않는 사람은 회원으로 자격이 없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주보에 자신의 시가 게재되지 않으면 그날부터 가시방석이고, 3주 연속 발표가 없으면 자동 제명이다.

이런 이들이 10여년 새 내놓은 시집만 100여권. 왠만한 기성 문학단체들도 엄두내기 힘든 다작이지만 베스트셀러라곤 14만원어치 팔린 시집이 유일할 만큼 독자 기억에선 미미하다.

그래도 10평 남짓한 동아리방 한 켠을 꿰차고 유작(遺作)인냥 남아 있는 선배들의 작품에는 이 땅을 살아 가는 젊은이의 희망이 조목조목 남아 있다.

첫모임을 목요일에 했다는 이유만으로 요즘도 매주 목요일이면 오라가라 말도 없이 꾸역꾸역 모인다. 맏형 격인 재인(83학번)씨부터 막내둥이 지현(02학번), 은진(02학번)까지.

이내 1주일 동안 틈틈히 써댄 작품들이 쏟아지고 설전이 붙는다. 멋을 너무 부렸다느니, 의미 전달이 안된다느니.

밤새 만든 시가 흠씬 두들겨 맞는 동안 후배들의 코가 석자나 빠진다.

"문청기르마는 시맹(詩盲)들이 모여 시를 같이 알아가는 곳입니다. 매주 목요일 모여 작품 합평회를 갖고 3번 불참시는 자동 제적 처리하죠. 어떤 때는 심하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그런 내부 규약이 우리를 지탱해 준 것 같습니다."

83학번 방재인씨.

방씨는 아직도 동아리를 돌보는 몇 안되는 창단 멤버, 그만큼 자리를 지켜주는 후배들이 항상 소중하고 고맙지만 무서운 선배역도 그의 몫이다.합평회 때는 반드시 시 1편 이상을 제출해야 하고 4학년 때 개인 시집을 내야 한다는 규약도 그가 만든 지침이다.

선배들의 쓴소리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넉살좋은 93학번 홍윤기씨와 94학번 이용호씨가 후배들을 다독거린다.

합평회가 끝난 후 삽겹살집도 빠지지 않는다. 소주가 몇 순배 도는 사이 딱딱한 격식이 없어지고 말 실수 나올 때쯤 마음 한 켠에 있던 시 구절들이 튀어 나온다.

끝없는 추락을 느껴봐야 제대로 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이들만의 노하우. 그 틈안에서 바둥친 젊은이들이다.

10년새 선배, 후배로 불리며 스쳐간 사람들만 130여명이다. 살아 남은 자가 28명이란 것은 순탄지 않았을 그들의 생활을 말해준다.

창립 당시 변변한 동아리방조차 없었다. 지하실 단칸방에서 강의실로, 후배 자취방으로 옮기다가 몇 년전 수천만원 빚을 내 현재의 동아리방 '선화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시에 대한 열정 하나 믿고 무작정 덤빈 일이었다. 시를 잘 쓰냐 못 쓰냐보다 얼마나 성실하느냐가 회원의 기준이었고 후배의 자세였다. 강한 훈련에 못 견디고 떠나가는 이들도 많았다.

한 때는 한 학번 전체가 탈퇴한 적도 있었다.

회원이던 학생을 따라 동아리방에 놀러왔다가 정작 회원이던 학생은 그만두고 대신 눌러 앉은 학생들도 부지기수다. 위기감이 돌았지만 그 때마다 힘이 되준 것은 10년 동안 변하지 않고 따뜻이 반겨주는 동아리방이었다.

요즘도 모일라치면 재학생보다 졸업생수가 많다. 재학생들도 갓 대학에 들어온 새내기가 대부분. 7대 독자 양반집 대 끊기는 것만 서러운 건 아니다.

"어려움이 많아요. 그래도 서로를 지탱해 주고 절필하지 않도록 격려를 해 주죠. 시인이 되려고 하기보다 시를 쓰는 글쟁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고 싶음일겁니다."

베스트셀러 작가 95학번 김태희(목원대 박사과정)씨는 외부에 동아리를 소개할 때마다 14만원어치 판 유명세를 톡톡히 치른다.

동아리 최대 자랑일법한데도 후배들에게 밉보인 날은 동아리 능력을 왜곡한 선배로 여지없이 추락한다.

마음이 넓어 '오지랍'이라는 강정미(01학번) 후배와 산소(02)학번 이지현, 장은진 후배는 그래서 김 작가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주요 용돈 출처다.

94학번 이용호씨와 93학번 홍윤기씨는 사회 진출 후 같은 직장에 다니며 계속 동아리 활동을 하는 열혈 동인들.

재치덩어리로 통하는 이씨는 위트와 역설적인 작품들이 많다.

시를 알기 위해서는 많은 작품들을 자주 써 봐야 한다는 그는 동인지를 만들 때면 회사에 휴가를 내고 작품 세계에 몰입한다.

이씨의 대학 선배지만 회사에선 후배라는 홍씨는 솔직한 시를 쓰고 싶어한다.

거짓말 안하고 이중적인 모습이 그가 꿈꾸는 곳이다.

박명화(95학번)씨는 동아리 선배인 임종선(91학번)과 '부부작가'다.

언제가 부부작가로 시집 한권 내는 것이 그녀의 소망이다.

대학원 박사과정인 이승이씨는 선배이면서 '선생님'이다.

시인이 되겠다고 나선 후배들에게 시의 'ㅅ'부터 가르치지만 싫은 소리 한번 안하는 살림꾼이다.

더부살이 10여년 만에 마련한 동아리방 불이 밤새 꺼지지 않는다.

세상에서 주어들은 이야기들을 글 위에 담느라 바쁘다.

지역 문학계의 이반들.

희미한 백열구 아래 그들의 문학 반란이 싹트고 있다.

'바짓가랑이 마찰음이
저벅저벅 빗길을 따라
우산 속을 휘감으며
순대국밥집으로 들어간다
몸배 입은 중년의 늙은이 말년의 할매
…비릿한 눈물 방울
문 밖, 비 내리는 순대국밥집
못·먹·겠·어'?
?(이승이 순대국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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