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당구사 한남대 임기대 교수

아지랑이 피어나는 봄 대학 캠퍼스 한 켠, 신세대들 사이에서 왜소한 체구의 교수가 강연에 한창이다.
"엉은 1이고 뒈는 2, 투아는 숫자 3입니다."
아라비아 숫자 뗀 지 10년은 넘었을 대학생들에게 프랑스 세계의 숫자를 가르치고 있다.
한번 들으면 기억할 법한데 기초부터 차근차근 가르치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수업을 끝낸 그에게 한 학생이 다가선다.
"교수님 당구 얼마 치세요?"
배우는 김에 이왕이면 스승의 수(數)까지 알고 싶다는 뜻.
특유의 수줍음 섞인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한남대 불문과 임기대(41) 겸임교수는 배움의 상징인 대학 교수이자 건달(?)세계의 입문격인 당구, 그것도 프로당구사다.

환한 조명섞인 녹색 당구대, 묘기 시범을 위해 임 교수가 큐를 잡자 좀전의 수줍음 대신 먹이를 향해 낙하하는 독수리처럼 강한 집중력이 느껴진다.
시선은 미동도 않지만 당구공의 흐름을 미리 읽는 듯 보인다.
힘들이지 않고 툭 치는데 모서리에서 몇 번 제자리를 돌던 공은 이내 다른 빨간공으로 달라붙는다.
"어… 저게 맞네, 거 참 예술일세."
당구 1000의 세계다.

한 게임 하자고 제자들이 떠밀지만 사래질이다.
일부는 1000의 세계라 다른 거냐고 하겠지만, 고 3때 당구에 입문한 후 20여년동안 되뇌인 철칙이다.

"제 나름대로 지켜온 원칙이 있습니다. 친구들과 안치고 게임 중 담배를 안피고, 잡담을 안하는 것이죠. 담배와 잡담을 안하는 것은 경기 중 기본적인 매너이고 친구들과 안치는 것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함이죠."

지금은 교직생활로 잠시 한 발 물러났지만 한 때 전국구 아마추어 최강 반열에 올랐던 자긍심이 묻어난다.

고 3 대입시험이 끝난 후 친구 손에 이끌려 간 당구장이었다.
스트레스를 풀 겸 호기심도 해결할 겸 들어간 당구장 풍경은 그야말로 신기함 그 자체였다.
초크칠 잔뜩한 녹색 당구대와 뿌연 담배연기, 시끄러운 잡담, 구석에 쌓여 있는 빈 자장면 그릇들….
무엇보다 한 구 한 구에 들인 정성과 달리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둥근 공의 불규칙이 자꾸 시선을 끌었다.
주먹 만한 공에서 좌충우돌하는 자신을 보는 듯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이름있는 고수들을 찾아다녔다.
당시 국내 1인자로 이름을 날리던 김용섭(현 대전당구아카데미)씨와 젊은 달인 김종호(현 대전당구협회장)씨의 수제자로 피나는 연습을 했다.
제법 재능도 있었는지 시작한 지 석달 만에 300이 됐고, 1년도 안돼 1000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각종 전국대회 출전이 이어졌다.
무수한 대회에 그의 이름이 오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의 빼어난 실력에, 그리고 20살 갓 넘은 대학생이란 말에 매료됐다.

"당시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못했죠. 1학년 때는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방황을 했습니다. 불규칙하게 이리 저리 튀는 당구공이 좌충우돌하던 저의 심경을 대변하는 것 같아 왠지 끌렸습니다."

제자들과 당구를 안친다던 그가 앞으로 나선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당구도 자세가 중요해. 당구는 기본자세를 완벽하게 익히면 실력이 빠른 속도로 향상되고, 반대로 나쁜 습관과 잘못된 자세로 익히면 실력 향상에 걸림돌이 되지. 자세를 이렇게 교정해 봐."

기본을 고집하는 것은 강의실에서 본 그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다.

임 교수의 고향은 대전, 대학생 프로당구인생을 접고 파리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대전을 벗어난 적이 없는 대전 토박이다.
편한 인상에 좋아하는 공만큼 둥글고 자유로운 인생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의 지나온 삶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어찌 보면 당구는 그를 지탱해 준 세상과의 유일한 끈이었다.
대학생활보다 밖으로 나돌았고, 친구들과 어울리길 좋아했다.

"진학 문제라든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심경이 복잡했습니다. 군대를 다녀온 후 이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공부에 매달렸고, 성적도 제법 좋게 나오더군요. 그러나 졸업할 때쯤 이력서란에 저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죠."

지난 89년 프랑스 유학길(파리 7대학)에 올랐다.
당구 승부사로서 인생 도발이었지만 생면부지의 파리생활은 고달픔의 연속이었다.
어렵사리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마련했지만, 유학 전 결혼부터 한 그에게 한 가정의 가장으로 집안 식구 볼 낯도 없었다.
아내에 대한 속죄와 '이방인'이란 보이지 않는 낙인에 항의하듯 미친 듯이 공부에 몰두했다.
결국 7년 만에 석사와 박사학위를 거머쥐었고, 고향으로 향했다.
한남대와 충남대 등에서 시간강사 생활이 시작됐다.

당구에 대한 인연의 끈도 놓지 않았다.
프로당구사로 SBS최강자전과 아리랑TV 당구대회에 출전했고, 당구 관련 잡지에 칼럼을 기고했다.

"전국대회에 출전했지만 성적은 좋지 못했습니다. 기라성같은 젊은 고수들이 두터운 층을 형성하고 있더군요. 개인적인 아쉬움도 있었지만 후배들이 열심히 해 줘 고맙더군요."

교수와 프로당구사, 전혀 다른 두 세계를 넘나들던 임 교수의 이력에 시티즌 외국용병 전담 통역요원이 보태진다.

"2001년 당시 친분이 있던 시티즌 이태호 감독이 세네갈 용병 콜리에 대한 불어 통역요원을 권하더군요. 축구도 좋아했고 배웠던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어 기꺼이 응했습니다."

이국생활의 설움을 톡톡히 경험했던 임 교수의 보살핌은 콜리를 2년 넘도록 시티즌 주전 수비수로 활동케 했다.

"남들은 교수와 프로당구에, 통역까지 다방면을 두루 접할 수 있어 좋겠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진지함을 갖는 것과 취미삼아 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깊이를 가지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다른 세계가 엿보이죠. 당구대 안을 빙빙돌던 공들이 이리 저리 튕기다가 만나듯이 사람의 인연이란 것은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어찌 보면 가르침이고, 어찌 보면 유흥인 듯한 그의 당구인생은 세상 속에 또 다른 만남으로 녹아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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