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대 박광기 교수의 유학시절 이색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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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한여름.

독일 바이에른 주 뮌헨의 시내 한복판 저녁 러시아워 왕복 6차선 도로 위에 한 택시가 갑자기 선다.

택시운전사는 비상등을 켜고 내린 후 자기를 향해 쏟아지는 빗물과 차량 행렬들의 경적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부인, 내리시지요. 모셔다 드릴 수가 없네요"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40대의 승객은 갑작스럽기 그지 없는, 그러나 정중한 동양인 택시운전사의 태도에 말을 잇지 못했다.

1분 전만 해도 운전사가 길을 제대로 모른다, 동양인인 주제에 택시운전을 하냐, 면허증을 보여 달라, 우리 국민들 일자리를 뺏는다는 등 둔탁한 독일어를 속사포처럼 내뱉으며 비아냥거리던 그 여성은 일시에 제압당했다.

택시운전사는 약간 상기됐긴 했지만 여전히 정중한 자세로 그가 승차거부(?)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면허증에 적혀 있듯이 택시운전을 한 지 3일밖에 안됐습니다. 지도를 보며 가도 되냐고 정중히 여쭈었지만 손님은 대답도 없이 재촉하기만 하셨구요. 그리고 동양인이니, 외국인이니 언급하며 저의 인격을 모독했습니다. 저를 승차거부로 신고하셔도 좋습니다. 전 못 태우겠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이란 항상 부족한 상태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박광기(43·대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NATO(북대서양 조약기구) 연합군 사령관에서 동성연애자, 유명 방송인에서 길거리의 마약중독자와 창녀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뮌헨의 택시기사가 된 건 1986년.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2년째 되는 때이면서 생활비가 없어 18일째 굶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5000개의 뮌헨 시내 도로명, 은행, 건물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격할 수 있는 120점 만점의 면허시험에서 합격선 100점을 넘은 사람은 응시생 100명 가운데 박 교수 혼자였다.

1995년, 10년 유학생활을 마칠 때까지 짭짤한 수입원이 돼 줬던 택시 운전사 생활은 그의 온 생애에 걸쳐 가장 튼튼한 정신적 버팀목으로 자리잡고 있다.

독일에는 도시마다 도시 한복판에 철길이 설치돼 전차가 운행되고, 대중교통수단이 잘 갖춰져 택시가 많지 않다.

택시 요금체계는 우리 나라보다는 2∼3배 비싼 편, 러시아워 때 할증을 받으며 콜요금도 콜을 받고 택시가 출발하는 순간부터 요금이 적용, 택시를 움직이는 비용을 완전히 승객에게 떠넘기고 승객들은 그것을 당연한 부담으로 생각한다.

독일 국민소득을 넘을 정도로 부자로 통하는 택시 운전사, 그만큼 외국인에게는 배타적인 직업이기도 하다.

택시일을 시작한 덕에 3주 넘게 못 냈던 방값도 낼 수 있었고, 언제나 잘 대해줬던 집 주인 안겔리카에게도 신세를 갚을 수 있었다.

집주인 안겔리카는 방값은 고사하고 생활비도 없어 굶는 박 교수를 위해 출근할 때마다 식탁 위에 편지를 남기곤 했다.

편지 속에는 10~20마르크씩 담겨 있었고, 편지에는 "광기 학생, 이걸로 배 채워"라고 짤막하게 써 있었다.

안겔리카는 매일 아무런 얘기도 없이 식탁 위에 편지를 남겼지만, 박 교수는 차마 그 돈을 다 쓸 수 없었다.

박 교수는 안겔리카의 돈을 최대한 아껴 쓰며, 18일간의 굶주림에서 벗어났고 그 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택시 운전을 해 그녀에게 받은 돈을 모두 갚았다.

날짜별로 꼬박꼬박 노트에 적어 놓았던 금액대로 정확히 돌려준 박 교수의 내면엔 '언제나 당당한 한국인'이라는 마음가짐이 자리잡았다.

하지만 택시 면허시험을 시작으로 곳곳에 외국인에 대한 배타의 벽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을 향해 만연해 있는 편견과 비슷했다.

어떤 배타의 벽들은 밤샘하며 공부해 실력으로 보란듯 넘어섰지만, 언제나 언어가 문제였다.

복잡한 문법과 성(性)에 따라 세분화돼 있는 단어들은 알면 알수록 어려워 결국은 공부하다 보면 스트레스로 병 얻기 십상인 탓에 독일어는 유학생들 사이에 '병'으로 통했다.

재력을 바탕으로 유학길에 오른 다른 학생들이 상아탑에 스스로 갇혀 있던 것과는 달리 박 교수는 그야마로 길 거리를 샅샅이 훑으며 생활 속의 독일어를 흡수해 나갔고, 뮨셰너(뮌헨 사람들)들은 당당한 한 한국 유학생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졌던 1989년.

그 해 12월 31일 자정을 약간 넘긴 시간 한층 상기된 20대 한 커플이 차에 올랐다.

"호프 부로이 레스토랑 가시죠?"

커플은 운전사의 어색함 없는 독일어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행선지를 미리 알고 있는 것에 깜짝 놀란다.

"놀라지 마세요. 사실은 정확히 1년 전 이 시간쯤에 호프 부로이 레스토랑으로 모셨거든요. 기억하세요?"

"아… 뮌헨 대학에서 정치학 공부하시는 분이시죠? 맞다, 맞다. 그 때 독일인도 아닌데 호프 부로이로 가는 지름길을 훤히 알고 계시던 분이죠? 한국 분단상황도 재밌게 말씀해 주셨던…."

기억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그것도 이국땅에서 그럴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한 경험이었다.

박 교수의 꼼꼼함과 당당함은 독일에서 더 많은 우연들을 끌어당겼다.

독일에서 가장 큰 도서관인 바이에른 주립 도서관에서 일하던 독일인 친구가 박 교수를 추천, 도서관 일을 시작하면서 엄청난 지식의 보고 한 가운데서 자유롭게 지식을 향유할 수 있었다.

도서관 인사담당은 박 교수의 충실한 태도를 높이 사 도서관의 보안키를 맡기는 신뢰까지 보였고, 박 교수는 동아시아부 도서를 책임지는 택시 운전사가 됐다.

지식의 보고 문지기의 택시에 탄 승객들은 풍부한 화제에 매료됐고, 그를 고정적으로 콜하는 손님들이 늘어났으며 이후 그는 프랑크푸르트 중소기업진흥공단 구주 사무소 번역에서 컨설턴트까지, 그리고 지금은 대덕벨리 벤처연합회의 유럽지역 고문 역할을 해내고 있다.

"뮌헨에서의 택시 운전사 생활은 언제나 생생한 현실로 느껴진다. 머뭇거리면 안될 일에 시간을 소비하는 학생, 기업인, 관료들을 보면 '안될 것은 확실히 포기할 때 비로소 대안이 보인다'는 얘기를 해 준다. 유학시절 택시 운전사 생활은 언제나 '선택과 집중'의 미덕을 가르치는 소중한 텍스트"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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