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유일 여자축구단 코치 홍택희씨

코흘리개 시절, 흙먼지나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처음 만났다.

호기 어린 마음에 힘껏 차 올린 축구공은 파란 하늘을 머금은 채 소녀의 마음을 빼앗아갔다.

450g의 작은 공은 어느덧 숙녀가 된 그에게 인생으로, 꿈으로 자리잡았다.

여성축구 클럽 '나누미 여성축구단' 코치 홍택희(26)씨는 대전 유일의 여자축구단 코치이자 대전 유일의 여성 국제심판이다.

어릴적 꿈인 월드컵 주역과는 다소 떨어진 지도자와 심판 생활이지만 푸른 구장과 함께해 비켜선 축구인생 또한 만족한다. 축구단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들어주는 하루 일과 또한 재미가 만만치 않다.

손에 쥔 호각은 그의 새로운 꿈이 담긴 축구공이다.

나누미 축구단은 평범한 전업주부부터 직장인까지 30, 40대 여성 2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간혹 선수생활을 했던 사람도 있지만 운동이 좋아 무작정 뛰어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습도 실전처럼' 맹훈련

화요일과 금요일 오후, 자양초등학교와 중구 유천동 유등천 둔치 잔디구장에서 갖는 두 차례 만남이 연습의 전부라면 전부.

처음에 공을 귀신보듯 하던 선수들도 이제 2년째 접어들면서 운동장 구보쯤은 알아서 할 만큼 구력이 붙었다.

아직 몸 따로 마음 따로이고, 공을 차다 넘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멋지게 골네트를 가르는 슈팅도 간간이 나온다.

팀워크가 잘 맞는 날은 세계 최고의 브라질팀이 부럽지 않다.

"초창기에는 볼 다루는 것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또 출석이 불규칙해 기본기 훈련도 늦은 편이죠. 그래도 요즘에는 가끔 저를 놀래킬 정도로 수준 높은 실력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홍 코치를 제외하곤 선수끼리 호칭도 가지각색이다.

"지연이 엄마 이리 패스해.", "김 선수 막아."

바쁘면 처녀때 이름도 나온다.

결혼 후 잊어버린 자신들의 이름을 알음알음 찾아간다.

처녀인 홍 코치의 아줌마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다.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수다떨기 바쁜 선수들은 홍 코치의 불호령을 감내해야 한다.

연습은 실전처럼, 실력보다 성실함을 우선시하는 홍 코치다.

이러니 선수들의 열정은 자연스럽다.

과격한 운동이라 간혹 부상도 있다.

한번은 선수 한명이 시합 중 볼을 잘못 밟아 발목 뼈에 금이 간 적이 있었다.

지금 나누미 축구단 후원회장으로 활동 중인 그 선수는 깁스를 한 채 연습에 참가해 홍 코치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실전 감각을 익히기 위해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동네 조기 축구회와 자웅을 겨룬다.

대전 유일의 여자축구단이라 실전에 맞는 연습상대 구하기는 어렵지만, 최근 조기축구회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올 한 해는 예약돼 있는 경기 치르기에도 빠듯한 듯싶다.

"조기 축구회에서 여자들과 축구하는 것을 재미있어 해요. 남자들끼리 할 때는 경쟁상대로 치열하지만 우리와 할 때는 여유를 갖고 하죠. 승부를 떠나 즐기는 축구입니다."

가정있는 선수들이다 보니 가끔 남편 관리까지 도맡는다.

자녀부터 시어머니까지 적극적인 지지를 업은 선수가 있는 반면, 남편이 결사반대하는 선수도 있다.

가끔 집안의 반대로 갈등을 겪는 모습에 덩달아 기운 빠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경기가 있는 날은 유일한 응원단이자 관중이 남편들이다.

인생 나침반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제법 제대로 온 길인 듯싶다.

대학교 선수 시절, 부상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접은 축구선수의 꿈이었다.

홍 코치의 고향은 대전. 동구 판암동에서 태어나 줄곧 판암동에서 부모를 모시고 산 대전 토박이 중 토박이다.

운동과는 인연이 먼 집안이었다.

"집 안에서 저를 보고 돌연변이라고 할 정도였어요. 고교 진로를 고민하던 중 학교 선생님이 축구를 권유하더군요. 당시 여자축구부를 창단한 동신고에 진학했고 그게 축구와 인연이 됐죠."

15명을 꾸려 한팀을 만들었다.

하지만 3개월도 못돼 절반 넘게 팀을 떠났다.

가장 민감한 사춘기 때 얼굴은 햇볕에 검게 그을렸고, 머리는 짧게 치도록 했으니 남녀공학인 학교에서 제대로 버틸 여학생들이 없었다.

반년쯤 지나 혼자 남았다.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포기는 싫었다.

커다란 운동장에서 혼자 볼을 차며 빈 자리를 메워 나갔다.

근성을 배운 때지만 그 일 이후 눈물이 많아졌다.

당시 김경수(현 관저고 교사) 감독과 이상석(현 한밭여중 축구부 감독) 코치의 격려는 유일한 힘이었다.

한 해가 바뀌자 다시 팀이 꾸려졌다.

주장이 된 그는 맏언니로 팀을 이끌어 갔고, 책임감은 남달랐다.

대전지역 1호로 여자대학(서울 한양여대) 축구선수가 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국내 여자축구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월드컵 심판 하고 싶어"

전국 대학과 실업을 모두 합해도 5개팀뿐이었다.

그래도 굳건히 버티던 그였지만 졸업반이 다돼 고교때 얻은 허리디스크가 크게 재발, 발목을 잡았다.

"졸업 후 1년 동안 방황했어요. 고향에 내려와서 모교 축구부를 도와주곤 했죠. 그게 안쓰러웠는지 선생님이 심판 연수를 받을 것을 권유하더군요. 축구를 너무 좋아했기에 지도자와 심판은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실기와 이론공부를 열심히 했다.

당시 여성 심판을 육성하자는 축구협회의 뜻도 맞아 떨어졌다.

지난 98년 3급 심판 자격증을 따냈고, 2000년 1급 심판 자격증 합격자에 이름을 올렸다.

유소년부와 대학팀 경기 심판으로 한달 내내 전국을 돌아다녔다.

어렵게 일군 제2의 인생인지 상복도 잇따랐다.

입문 첫해인 2000년 도로공사배 전국 여자종별대회 심판상을 수상했고, 코리아 여자축구대회 심판상(2000년), 청학기 전국 여자 중·고교 축구대회 심판상(2001년), MBC배 춘계여자축구연맹 심판상(2002년) 등을 차례로 거머쥐었다.

지도자 의뢰도 들어왔다.

지난 2001년 대전 동구에서 여자 축구팀을 결성키로 했고, 코치로 대전지역 출신인 그가 전격 발탁, 지금의 나누미 여성축구단 코치 겸 인동생활체육관 생활체육지도사로 활동 무대를 넓혔다.

불모지인 여성축구이다 보니 유달리 '최초'란 수식어가 많이 붙는 그는 명예보다 부담감이 더하다고 한다.

요즘 지역 공익 캠페인에 그 소개가 되면서 자신의 길에 신중함이 더해졌다.역경으로 점철된 축구인생이지만, 후배들에게 보다 나은 여건을 만들어 주고픈 마음이다.

"한국 국제심판 23명 중 여성은 6명입니다. 대전 출신 여성심판이 늘어나길 바라는 마음도 있고, 전 세계에 한국 여성심판의 우수성을 알리고 싶은 개인적인 포부도 있습니다. 언젠가 월드컵 심판을 해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정말 소중한 것은 월드컵 본선보다 그 곳에 가기 위해 흘린 땀방울이 아닐까 합니다."

'삐익∼.' 그가 호각을 힘차게 분다.

푸른 구장을 뛰어가는 나누미 여성 축구단과 홍 코치가 머문 자리에 숨죽였던 월드컵 열기가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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