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20주년 展 내년 3월 3일까지 열려
국내외 유명 미술관·개인 소장 작품 전시
1전시실 1959년 이후 그린 걸작 모아 구성
2전시실 서거 직전부터 시간 거슬러 올라가
이응노 유럽 이주 전 작품들도 전시돼 눈길

‘지게꾼들’_1940년대 후반 
‘지게꾼들’_1940년대 후반 
‘대죽’_1932
‘대죽’_1932
‘구성’_1970년대 후반
‘구성’_1970년대 후반
‘산수’_1930년대 후반
‘산수’_1930년대 후반

[충청투데이 조정민 기자] 이응노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이응노 탄생 120주년을 맞아 협력 특별전을 마련했다.

이번 ‘이응노, 동쪽에서 부는 바람, 서쪽에서 부는 바람’ 전시는 지난 28일 개막을 시작으로 내년 3월 3일까지 진행된다.

국립현대미술관, 이응노미술관, 프랑스 퐁피두센터, 체르누스키 파리 시립 아시아 미술관 등을 비롯해 국내외 유명 미술관과 개인 컬렉터가 소장해온 이응노 작품이 대거 전시된다.

전시에 소개된 60여 점의 출품작은 대다수 국내 미공개 작이라는 점 외 이응노의 작품 세계 전체를 고르게 보여주도록 선정됐다는 점에서도 집중해볼만 하다.

1958년 유럽 이주를 기점으로 그 이전, 이후의 작품이 함께 전시돼 각 전시실마다 이응노의 한국적 뿌리와 유럽에서 받은 자극이 어떻게 충돌하고 융합해 독자적 작품으로 탄생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이렇듯 이번 전시를 통해 이응노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을 남긴 작가이자 유럽과 아시아, 미국 등 전세계에 작품이 소장돼있는 국제적 작가이기도 한 이응노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한다.

◆ 1전시실, 충돌과 융합

1전시실에는 이응노가 유럽에서 활동을 시작한 1959년 이후 그린 작품들 가운데 걸작만을 모아 구성됐다.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지닌 관람객들을 만나며 이응노의 작품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이응노 작품 속 한국미술과 유럽미술은 어떻게 충돌하며 창조적으로 변화했는지를 추적, 상상해볼 수 있다.

1989년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린 이응노 추모전에 전시된 ‘구성’은 한국에는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며 1970년대 후반의 ‘구성’을 통해서는 작가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원색과 평면적인 배경 구성, 굵은 윤곽선으로 둘러싸인 도형들은 수묵화가 이응노의 또다른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가족’을 의미하기도 하는 1970년대 후반의 ‘구성’은 세 명의 사람이 하나의 거대한 날개를 지닌 형상이며 원색이 주는 한국적 분위기와 밝고 화사한 느낌이 가족의 따뜻함을 훌륭하게 시각화한다.

이어 1980년대 ‘군상’에서는 수많은 인간들이 무리지어 움직이는 모습이 등장하기 시작해 작품을 본 사람들마다 저마다가 속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따라 의미를 해석한다.

‘군상’ 시리즈는 이응노의 마지막 변모이자 백조의 노래처럼 모든 것을 쏟아부은 작품이기도 하다.

◆ 2전시실, 서쪽에서 부는 바람: 유럽, 1959-1989

2전시실은 1989년 이응노가 서거 직전 그린 작품 ‘군상’에서 시작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 이응노가 막 유럽에 도착했던 1959년 작품에 이르도록 구성했다.

이응노의 유럽활동시기는 30여 년의 긴 시기이지만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종이와 붓, 먹이라는 동아시아의 전통 재료로 그렸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오랜 유럽활동에도 불구하고 이응노 작품의 바탕은 동아시아 전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2전시실에 전시된 작품들은 이응노가 유럽에서 처음 새로운 서구의 예술 경향을 받아들이며 재료 실험을 하던 콜라주부터 사의적 추상, 서예적 추상, 군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대나무, 난초, 등을 먹으로 그린 전통 사군자와 독특한 스타일의 서예작도 있다.

이응노의 스케치 60여 점도 2전시실에 전시됐다.

작품화되기 이전의 스케치들을 통해 생생하고 날 것 그대로의 아이디어를 보여준다.

◆ 3전시실, 동쪽에서 부는 바람: 아시아, 1930-1959

3전시실에는 이응노가 유럽으로 이주하기 이전의 작품들이 전시됐다.

1930년대 이응노가 즐겨 그렸던 대무와 난초, 1936년 일본 유학 후 그린 실경산수화, 해방 이후 1950년대 대표적 인물화 등이 골고루 배치됐다.

이 시기 습득한 동아시아의 미술 전통은 그가 유럽에서 활동하는 데 끊임없이 자양분을 제공했다.

‘죽사’라는 호가 알려주듯 이응노는 1930년대 대나무 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3전시실에 전시된 ‘대죽’(1932)과 ‘분란’(1933)은 초기 이응노 사군자 그림의 특징을 보여준다.

전통적 사군자를 즐려 그리던 이응노였으나 현대미술을 연구하고자 하는 열망도 함께 지니고 있어 1936 일본 유학을 통해 동양화와 서양화를 동시에 고부하며 산수풍경화가로 변신하게 됐다.

그는 "권력자보다는 약한 사람들, 함께 모여 살아가는 사람들, 움직이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 뭔가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 관심이 갔고 그들 속에 나도 살아있음을 발견하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950년대 평범한 삶 속 노동하는 사람들을 그린 ‘영차영차’, ‘굴뚝청소부’, ‘지게꾼들’ 같은 작품으로 뚜렷하게 드러난다.

◆ 4전시실, 동양미술학교: 1960-현재

마지막 4전시실에서는 이응노가 프랑스에서 운영한 동양미술학교와 관련된 작품 및 아카이브를 통해 그의 동양화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프랑스에 정착한 이응노는 1962년경부터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동양화와 서예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유럽 최초 동양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1965년부터는 체르누스키 미술관에서 교육을 진행했고 ‘동양미술학교’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했다.

동양미술학교는 최근까지도 꾸준히 진행되며 3000명이 넘는 다양한 국적의 제자를 육성했다.

이응노는 해방 직후부터 동양화를 가르치는 교육기관 설립을 해방 직후부터 꿈꿔왔으며 1945년 서울 남산의 ‘고암화숙’, 1956년 서울 신교동의 ‘고암미술연구소’에서 이미 젊은 동양화가를 키우고 있었다.

제자를 대하는 교육자로서 그의 태도에는 동양화가로서의 소명의식이 깃들어 있었다.

스승 이응노를 기리는 제자들의 모임은 현재도 이어지며 그가 유럽에 남긴 족적을 기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조정민 기자 jeongmin@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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