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7할은 자전거통학을 했다. 자전거는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항상 앞선 풍경보다 뒤처졌다. 종아리의 근육은 찢어질듯 팽창했지만, 생각의 근육만큼 질기지도 않았다. 왜 두 팔과 두 다리의 동력이 필요한지 때론 지쳤다. 운전면허증을 따던 날, 난 대학 합격했을 때보다도 기뻐했다. '애마'가 필요했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고, 생애 최초 자력으로 자동차를 구입했다. 당시 50만원을 주고 '포니2' 중고차를 샀다. 바퀴가 달려있어 자동차였지, 사실은 좀 더 빠른 '달구지'였다. 하지만 애인을 옆자리에 태우고 의기양...
▶영원한 동지는 없다. 총선을 앞두고 보수, 진보의 경계를 넘나드는 정객들의 움직임이 사납다. 권력의 향배만을 따라 이동하는 월경(越境)이다. 한때 청와대서 잘나갔던 핵심 비서관은 청와대를 저격하고 있고, 야당 대통령의 금쪽 같던 ‘오른팔’은 야당을 향해 호통치고 있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모태가 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투신했던 어떤 원로와, 여야 협곡을 넘나들던 한 원로는 훈수정치에 여념이 없다. 이들에게서 검은 고양이도 보이고, 흰 고양이도 보인다. 잘못된 흑묘백묘(黑猫白猫)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담배연기가 창백하다. 새벽녘 조깅을 끝내고 한숨을 돌리는데, 왜 담배 생각이 간절한지 이율배반적이다. 간헐적 유혹이고, 치명적 자학이다. 더더구나 이른 아침, 공복에 넣는 연기는 본의 아니게 달다. 폐활량을 죽이는 생명단축의 연소가 살아 꿈틀거린다. 새벽의 색깔과 연기의 색깔, 그리고 몸이 치받는 모종의 색깔은 같다. 다소 과장된 듯한 이 욕망의 원죄를 따져보면 주체가 모호하다. 흡연의 가해자는 본인이다. 그 누구도 담배를 권하지 않았다. 어릴 적 뒷골목에 숨어든 짝패들이 살짝 연초(煙草)를 건넸지만 불을 댕긴 적은 없었으니...
▶아이들이, 아이들일 때 많이 놀아주지 못했다. 내가 택한 건 송일국이나 추성훈이 해주는 ‘연예인 이벤트’가 아니라, 그냥 우유병을 삶고 설거지를 하는 정도였다. 가끔 와이프가 멋대가리 없는 아빠라고 평가하면 그때서야 섬으로 놀러갔다. 물론 아이들이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했을 때도 설거지만 했다. 나의 아버지 또한 나와 놀아주지 않았다. 노동이 놀이였다. 해도 해도 표가 나지 않는 농사일에 투입됐고, 잠시 틈이 나면 미루나무 위에 올라가는 게 놀이였다. 미루나무에서 내려다보는 절망의 높이는 서글펐다. 너무 외로워 나무에서 그냥 ...
▶초년고생(初年苦生)과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단다. 이 상투적인 말은 알고 보면 헛소리다. 고생을 해서 이루는 성취보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는 게 백배 낫다. 흙수저가 금수저를 이기기란 쉽지 않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다는 건, 계란이 바위에게 까부는 격이다. 누군가는 '7포 세대'(연애·결혼 등 7가지 포기)라고 자조하고, 누군가는 '헬조선'(hell朝鮮:지옥 같은 한국)이라고 절규한다. 한번 약자(弱者)는 평생 약자라는 신분 고착화의 절망 담론이 우리 사회를 휩쓴다. 기성세대는 청년 세대를 향해 헝그리 정신이 없다고 개...
▶'응답하라 1988(응팔)'은 드라마가 아니라 삶이다. 마치 이삿짐을 나르다가 우연히 열어본 박스에서 옛날 일기장을 발견한 듯하다. 이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 건 역설적으로 말하면 현재의 삶이 살만하지 않다는 증거다.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가족과 이웃 간의 정, 부모들의 애환, 어려움을 함께 견뎌내야 했던 모든 이들의 마음을 가슴 밖으로 소환해낸 페이소스(Pathos)다.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잊고 살았던 추억의 가치를 끄집어내어 위로한 것이다. 그런데 그 소소한 풍경이 명치끝을 뻐근하게 한다. 이들에게 직업과 신분의 귀천(貴...
▶'여름새'는 이른 봄 남녘에서 날아와 번식하고, 가을에 남녘으로 간다. '겨울새'는 나그네새다. 북쪽 번식지와 남쪽 월동지를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통과한다. 떠돌이새(漂鳥)는 여름에 깊은 산지로 들어가 번식하고, 가을부터 봄까지는 평지에 내려와 생활하는 조류다. 철새들이 이동하는 이유는 천적과 추위를 피해 번식하기 위해서다. 떼를 지어 이동하면 길을 잃을 확률도 줄어든다. 그런데 요즘 지구촌 철새들이 길을 잃어가고 있다. 철새가 길을 잃는다는 것은 곧 집단의 죽음을 의미한다. 길은 곧 삶이고 방향이다. 머물렀던 둥지는...
▶아뿔싸, 한해가 속절없이 가는 게 허망했나 보다. 12월의 끝을 부여잡고, 고주망태가 됐다. 1월보다 먼저 취했고, 12월보다 빨리 혼이 나갔다. 귀로(歸路)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위기의 방아쇠를 당긴 듯 한참을 걸어도 제자리였다. 더욱 황망한 일은 ○○씨와 통화를 하다가 발을 헛디뎌, 아파트 화단으로 고꾸라진 거였다. 온몸이 흙 범벅이가 됐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흙 악취가 풍겼다. 지나가던 아가씨가 '괜찮냐'며 손을 내밀었다.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다고 했다. 지나가던 아저씨가 또 손을 내밀었다....
▶ 요즘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양말을 걸어놓지 않는다. 깊은 밤까지 멀뚱멀뚱 기다리지도 않는다. 철이 들어서가 아니라 이미 부모의 ‘거짓말’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산타클로스가 왕래할 굴뚝도 없다. 만약 굴뚝이 있다 해도 산타는 뚱뚱해서 굴뚝을 오갈 수 없다. 수학이나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산타의 존재는 미증유(未曾有)다. 산타가 하루 동안 지구에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려면 소리보다 빠른 속도로 비행해야한다. 지구촌 아이들이 20억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거리상으로는 31억2500만㎞, 1초에 2600㎞를 달...
▶분설은 가루눈이다. 온도가 낮을 때 내린다. 분설은 끊기가 없어 잘 뭉쳐지지 않고, 옷에도 잘 묻지 않는다. 젖은 눈은 습설이다. 기온이 높을 때 내린다. 수분이 많이 함유돼 있어 잘 뭉쳐진다. 진눈깨비는 눈과 비가 섞여서 내리는 것이다. 눈 같기도 하고, 비 같기도 하다가, 다시 눈도 비도 아닌 혼혈의 정경을 띤다. 꽃술이 비에 젖어 그 무게감을 못 이기고 떨어지는 꽃비 같다. 꽃비는 아름답지만 땅에 닿는 순간 진흙탕을 만든다. 때문에 떨어지기 전까지만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낙화(落花)하면 쓰레기다. ▶민들레(포공영)는 쓸...
▶올해도 어김없이 '끝'은 오고야 말았다. 12월은 마지막이고 절정이다. 절벽 끝에 외롭게 버티고 서서 밤하늘을 향해 길게 내지르는 늑대의 울음 같다. 그 속에 절대 고독과 생의 쓸쓸함이 더해진다. 그래서 눈물이다. 내일이면 전선(戰線)으로 떠나야하는 병사들이 뜬눈으로 지새워야 하는 마지막 밤, 막차를 놓쳐 정거장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밤의 ‘끝’은 두렵고 공허하다. '마지막'인줄 알면서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은 누구에게도 처연하고 비장한 것이다. '첫사랑'은 끝을 전제로 시작되고, '끝'인줄 알면서도 시작된다. 1988년, 첫사...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 그러려면 겨울만의 온도가 필요하다. 물과 얼음 사이의 평형온도 0℃가 되지 않으면 겨울이 아니라, 가을이 미처 떠나지 못한 것이다. 가을은 가을답게 떠나야하고, 겨울은 겨울답게 와야 한다. 그래서 빙점(氷點)은 액체를 고체로 만들겠다는 극한온도의 접점이다. 인간과 계절 사이에 흐르는 이 냉소적인 온도차는 결국 마음의 온도를 쥐락펴락한다. 차디찬 겨울은 바람의 온도로 알 수 있다. 필경, 바람엔 가을이 미처 담지 못한 여름날의 기억들이 묻어있다. 그래서 붉은 낙엽마저도 푸른 삼투압을 그리워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