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자그마한 시(詩) 문학상을 받고 등단했다. 객기가 넘쳐 자주 대취했고, 정신적 허방에 빠져 헤맸다. 시상(詩想)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세상을 주유하듯 긁적였다. 그러나 시는 '밥'이 되지 못했다. 도처에 가난이 보였다. 배고픈 미래가 확연히 그려졌다. 더구나 시는 쓰면 쓸수록 가식적인 언어가 됐다. 가령 '사랑은 이기적'이란 간단한 말조차도 '사랑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며 언어유희에 젖었던 것이다. 글이 글을 속이니, 위선적인 창작이었다. 시(詩) 100편을 마친 어느 날,... [나재필 기자]
▶중학교까지는 글과 담을 쌓았다. 그냥 싫었다. 쓸 말도 없었지만 일단 쓰기도 싫었다. 간혹 점수를 위해서라면 농사꾼인 부모의 말을 빌어서 썼다. 그러나 정작 말은 글로써 표현되지 않았다. 그러니 더 글이 싫어졌고 더불어 말이 괴로웠다. 하지만 학교교육은 말을 강요했고 그에 따른 글을 요구했다. 세상이 글로써, 말로써 지겨워질 즈음 개벽이 일어났다. 별안간 글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교 국어선생님 덕분이었다. 교사는 말로 글을 가르치는 법인데, 이 분은 글로 말을 깨우치게 했다. 못써도 칭찬했고 못써도 고치지 않았다. 다... [나재필 기자]
▶밥솥에 쌀을 안친다. 손바닥을 수면에 대고 물의 양을 가늠한다. 손등 위까지 찰랑찰랑하면 좋다. 그것보다 물이 많으면 밥이 질고 적으면 되다. 찌개가 끓고 있다. 김치찌개는 오래 끓일수록 맛이 우러나고, 된장찌개는 센 불에 확 끓여야 텁텁한 맛이 줄어든다. 김치찌개든 된장찌개든 새우젓을 조금 넣으면 묘한 풍미가 있다. 나물은 소금과 깨소금으로 조물조물 무치는데 아무리 요리를 못해도 참기름을 두르면 맛이 산다. 중국요리는 파 기름, 서양요리는 올리브유만 있으면 절반은 끝난다. 천하의 백종원도 이런 간단한 레시피를 뻥튀기해서 먹... [나재필 기자]
▶개(犬)의 조상은 늑대다. 소설 같은 얘기지만 팩트다. 늑대(티베트 승냥이)가 개로 진화하는데 자그마치 1000만년이 걸렸다. 그 억겁의 세월 동안 늑대의 발톱은 퇴화됐고 사납던 성정은 꼬리를 내렸다. 늑대와 개의 차이는 길들여졌느냐, 길들여지지 않았느냐의 관점에서 달라진다. 늑대가 개가 된 것도, 개가 가축이 된 것도 순전히 사람 탓이다. 1만5000년 전 '동구 밖'에서 '집안'으로 들어온 개는 수많은 부침을 겪었다. 본색이 가축임에도 가축 지키는 일에 동원됐고 때로는 사냥견, 투견(鬪犬), 식견(食犬)의 운명을 살았다.... [나재필 기자]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다. 어머니가 짓는 끼니엔 한숨이 절반이다. 아들도, 딸도, 청년도, 노인에게도 세상의 절반은 비애다. 먹고사는 단순한 여정이 지옥 같고 감옥 같다.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칠정이 모두 울음 운다. 이렇게 답답하고 울적할 땐 꺼이꺼이 소리쳐 우는 것이 가장 빠른 치유다. 통곡에 가깝게 운다는 건 웃는 것과 같은 질감이다. '사내는 평생 세 번만 운다'는 말은 정녕 틀렸다. 어쩌면 세 번만 빼고 들키지 않았을 뿐이다. 가장(家長)의 눈물은 처마 끝 시래기에 걸려있는 빗물처럼 위태롭다... [나재필 기자]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고? 곰곰이 생각해보라. 진짜 물만 먹었는지. 혹시 너무 많이 먹어서 물을 켜는 것은 아닌가. 그것도 아니라면 무언가를 물처럼 마구 먹었을 수도 있다. 물은 0㎉로 열량이 없다. 열심히 운동했는데 살이 안 빠진다고? 살짝 뒤돌아보라. 일주일에 두 번 하면서, 그것도 땀 한 방울 안 나게 '살살' 했을 수도 있다. 밥(탄수화물) 양을 확 줄였는데 왜 살이 찌냐고 불평도 하겠지. 손에 들린 게 뭔가? 팝콘, 햄버거, 비스킷이다. 밥은 적게 먹는데 주전부리를 하염없이 먹고 있잖은가. 그럴 바엔 차라리 밥을 먹... [나재필 기자]
▶밤 11시다. 라면을 끓인다. MSG 향기가 침샘을 적신다. 이건 간식이 아니라 야식이다. 물론 둘 다 살은 찐다. 술 한 잔을 걸쳤는데 안주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이 밤참의 단초다. 예전엔 깡술(강술)에도 무너지지 않았지만 요즘엔 픽픽 쓰러진다. 그래서 '사후약라면(事後藥라면)'을 먹는다. 살찔 걱정 때문에 술을 줄여본 적이 없다. 살찔 염려 탓에 야식을 참아본 적이 없다. 그냥 마시고 먹는다. 음주와 밤참이 몸에 이롭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다. 난, 결단코 내 몸을 사랑한다. ▶자, 술과 밥의 유죄 혐의를 실... [나재필 기자]
▶집 근처 도솔산은 낮아서 좋다. 가파른 오르막이 한개 뿐이다. 두개의 구릉도 부담스러운 편이 아니다. 나머지는 오솔길이어서 등산이 아니라 산책에 가깝다. 곱게 깔린 황톳길은 발바닥의 압점을 전혀 거스르지 않는다. 길 양편의 숲 또한 피톤치드의 기운을 아낌없이 뿜고, 그 기운은 사위를 감싼다. 이런 호사 덕에 최소 보름에 한 번씩은 도솔산에 간다. 산은 사계절의 표정 외에도 특별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특히 가을 산은 묵직해서 좋다. 신록이 적갈색으로 가기 전 막심을 쓰는 때라 풍경이 아주 적요하다. 깊다. 바람 또한 적당한 ... [나재필 기자]
▶신문사 일을 하다보면 하루에도 수천여건의 기사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사진도 수천 장이다. 그러다보니 읽기 싫은 거, 보기 싫은 것을 어쩔 수 없이 봐야할 때가 있다. 워낙 '쓰레기'들이라 당장 '휴지통'으로 버리고 싶지만 그런 허섭스레기 다 버리고나면 지면에 담을 게 없다. 그만큼 이 세상은 읽고 싶은 것보다는 꼴 보기 싫은 것들 투성이다. 참으로 신문 만들기 힘들어졌다. 그나마 옛날이 좋았다. 오히려 그땐 보고 싶은 거, 읽고 싶은 것만 엄선해 만들 수가 있었다. 다소 고압적이긴 했지만 '쓰레기'들을 진짜 쓰레기 취급할 ... [나재필 기자]
▶옛날엔 잘은 못 먹어도 건강하게는 먹었다. 배고픔을 잊기 위한 조·피·기장·메밀·고구마·감자는 눈물로 쪄낸 주식이었다. 이들 구황(救荒) 작물들은 생육기간이 짧고 가뭄, 장마에도 영향을 받지 않아 기근일 때도 풍족했다. 기근의 기(飢)는 곡식이 여물지 않아 생긴 굶주림을, 근(饉)은 채소가 자라지 않아 생기는 굶주림을 뜻한다. 먹을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고마움을 느꼈던 그 시절의 배고픔은 차라리 정직했다. 음식을 잘못 먹으면 폭력이다. 육체적 욕망을 갈구하게 만드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인류 유전자는 식욕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나재필 기자]
▶비가 우두둑 내린다. 하늘에 천공이 난 듯 쏟아 붓는다. 우산이 없어 대략 난감이다. 피할 수도, 피해갈 수도 없다. 아열대기후로 변한 지금, 비는 스콜처럼 내린다. 맑았다가 찌푸리고, 인상을 썼다가도 이내 주름을 편다. 그렇다고 지나가던 건물에 기댈 수도 없다. 처마가 없다. 타인의 젖은 어깨를 한 뼘도 허락하지 않는다. 우산 같은 처마는 없다. 정감이 사라진 돌덩이에서 자괴감만 느낄 뿐. 이제 비가 오면 그냥 뛰던지 맞던지 양자택일이다. 비를 맞는 것이 비를 피하는 터닝 포인트다. ▶세상엔 종잡을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 [나재필 기자]
▶닭장수에게 닭을 '봉'이라고 속여 판 희대의 사기꾼 봉이 김선달, 그가 대동강물을 팔아먹었다고 했을 때, 믿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흔한 게 물이었는데 돈을 주고 사먹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아니었던가. 더구나 제 것도 아닌 공공의 '물'을 개인이 팔아먹는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김선달은 나루터에 앉아 물 값을 받아 챙겼고, 심지어 대동강물 전체를 4000냥에 인수하는 매매 계약까지 했다. 당시 황소 60마리를 살 수 있는 금액이다. 물론 픽션의 인물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물장수의 내력을 쫓다보면 완전... [나재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