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4세기경 로마는 압제의 제국이었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민중은 절망했다. 차라리 세상이 종말하기를 바랐다. 유태인 목수의 아들 예수는 성난 군중에게 소리쳤다. “나는 이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가져다주려고 왔노라.”(마태복음) 예수는 메시아라기보다는 강성 좌파였고, 연설을 잘하는 정치가였다. 요즘으로 치면 진보다. 예수는 지배계급의 돈줄이 되는 상행위에 분개해 상인을 추방했고 지배계급을 공격했다. 로마제국은 카리스마 넘치는 '정객' 예수의 노골적인 비토를 더 이상 묵인할 수 없었다. 결국 유다의 배신으로 붙잡힌 예...
▶난 때때로 외로움을 토로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 아닐진대 마음의 중력이 무시로 가볍다. 그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필시 외딴집에 오래 산 DNA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생의 절반을 이웃과 이웃하지 않고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외로움은 지병처럼 쉽게 떠나지 않는다. 두려운 일은, 바로 그 두려움을 스스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유배지가 아닌 곳에서 유배의 느낌으로 산다는 건 슬프다. 혈연공동체의 이 병약한 징조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스스로의 자학일 뿐이다. 그리움의 감정은 습지대 늪처럼, 썰물 때의 갯벌처럼 한번 발...
▶○○씨 발인(發靷)에도 난 운동을 했다. 그들의 눈물이 겨울을 먹먹하게 할지언정 태연하게 뜀박질을 한 것이다. 그들의 입관은 그들만의 입관일 뿐이었다. 그들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듯, 그들 또한 내 슬픔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고, 난 나일뿐이니까. 내가 내린 평범한 결론은 비록 비루하고 야박하나 세상은 그러하다는 것이다. 누가 내 눈물을 온전히 이해할까. 동시에 누가 그들의 눈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이 내 괴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듯, 나 또한 그들의 괴로움을 감당하지 못하니, 동대동(同一)...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챙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얼굴을 붕대로 가린들 투명인간이 될 수는 없다. 그놈이 그놈인 것을 모두들 안다. 투명인간이 된다는 건, 욕망을 방해하는 갑갑한 시스템과 작별하는 일이다. 내가 무얼 보든, 무얼 먹든, 무슨 짓을 하든, 막을 사람은 없다.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투명인간이 돼서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걸 고르라면, 여자 목욕탕에 들어가는 일과 은행(銀行) 터는 일일 것이다. 시험 문제지를 도둑질하고,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미워하는 작자를 혼내주는 일 따위는 후순위다. 투명인간이 되고 싶은...
▶설거지란 말은 왜 이리 슬플까. 견뎌온 삶의 물집들이 섬섬옥수를 저며 와서 그럴지도 모른다. 설거지는 하루의 얼룩들을 씻어내는 씻김굿이다. 우린 한평생(결혼생활 60년·하루 평균 60분 기준) 설거지에만 2만1600시간(900일)을 바친다. 자그마치 2.4년이나 부엌 개수대 앞에 서있는 것이다. 삼시세끼 후 쏟아내는 그릇들은 산더미다. 네 식구 기준이면 밥그릇·국그릇만 8개요, 반찬그릇 데커레이션도 10여개를 넘는다. 프라이도 하고, 생선까지 굽는다면 이제 설거지는 허드렛일이 아니라 노동이다. 맞벌이 시대, 남자들은 세차를 ...
▶새벽 4시에 잠이 깼다. 그런데 사실은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잠 못들었다는 것이 팩트다. 눈만 감고 있었지, 의식은 내내 깨어있었다. 물론 잠을 자기 위해 자정부터 엄청난 공을 들였었다. 생각의 다산(多産)은 불면을 부른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오지랖 넓게) 가뭄걱정도 하고 역사교과서 걱정도 했다. 22조원이나 처들인 4대강도 떠올랐다. 강을 판 것인지, 운하를 판 것인지 도통 모를 그 미증유의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한 백성의 망상이 당최 옴나위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새벽 4시20분에 자리를...
▶질풍노도의 계절이다. 찬바람이 옷깃에 닿자마자 마음이 얼어붙는다. 바람이 성나고 사람이 성나고 마음이 성난다. 이럴 땐 따뜻한 국물이 필요하다. 탕(湯)은 마음의 온도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 맑은 국물 속에 오사바사한 정이 들어있고 사근사근한 배려가 녹아있다. 그런데 따뜻해지고 싶은 계절엔, 차가운 사람들이 두려워진다. 사람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건, 사람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사람의 몽니가 두려운 것이다. 괜히 시비 걸고, 몽짜 부리고, 남 탓만 하는 군상들이 많아지고 있다. 몽니 부리는 사람들의 화(火病)는 얼굴에 깊...
▶회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뒷골목에 허름한 단골술집이 있다. 땅거미 어스름 내려, 꽃등불이 켜지면 으레 습관처럼 기어드는 곳이다. 이곳을 번질나게 가는 건 진짜 버릇 같다. 물론 안주솜씨가 특별하다거나, 여주인의 맵시가 특별하지도 않다. 그런데 얼마 전 '거래'를 끊었다. 그날따라 현찰이 없어 소주 한 병 값(3000원)을 외상으로 달려고 했는데 그녀가 매몰차게 거절한 것이다. 근 10년 간 기천만 원은 족히 갖다 바친 곳인데 너무 매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여주인은 시시때때로 계란프라이 서비스를 원하는 주객을 '잠...
▶어둠속을 혼자 걸었다. 아스피린 몇 알 먹고도 가시지 않는 편두통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난 시시때때로 꽤 심한 두통을 앓곤 했다. 그때마다 혼자 걸었다. 갈 길을 정해놓지 않고 무작정 걷다보면 무슨 처방을 받은 것처럼 두통이 사라졌다. 그때 이후론 두통의 조짐만 있으면 일부러 걷는다. 걷는 것은 정리하는 행위다. 머릿속을 정리하고 몸을 정리하고 일상을 정리할 수 있다. 더욱이 어둠은 불빛의 가장자리에서 전경의 일부를 삼켜버리며 고뇌를 분쇄한다. 밤이 되면 일상의 소리가 잦아들고 생각의 데시벨이 높아지는 법이다. 감질나지만...
▶고향 수안보에는 '가족탕(온천목욕탕)'이라는 게 있었다. 공중목욕탕에 다다미방 같은 작은 가족실이 여럿 딸려있는데 일제강점기 온천여관에서 비롯된 형식이었다. 조금은 부끄러울 것 같지만, 나신을 보는 게 아니라 나신을 닦는 도량이니 부끄럽지 않았다. 유리문을 열고 욕실 안으로 들어서면 뿌연 김이 자욱했고, 그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하늘색 타일 바닥, 온도 표시도 없는 온탕·냉탕 욕조가 달랑 2개 있었다. 섭씨 59℃짜리 온천수를 43℃로 식힌 온탕은 생각보다 더 뜨거웠고, 냉탕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차가웠다. 가족 전체가 발가...
▶완연한 가을이다. 바람결도, 볕도 제법 냉소적이다. 가을은 1년에 4분의 1정도 할애되지만 훅 왔다가 훅 간다. 이런 좋은 날들이 오면, 있는 힘껏 가을볕의 온도를 잡아야한다. 만약 한가롭게 안부를 묻고 있다가는 별안간 겨울을 맞는다. 가을은 냉혹한 겨울의 사전답사다. 예비하지 않으면 지난 겨울의 뼈마디 시렸던 기억만이 폐부를 찌를 뿐이다. 여름의 최절정 진앙에서 벗에게 안부문자를 보낸 적이 있다. "더위 안에 있는가? 더위 밖에 있는가?" 벗은 삼매(三昧·한 가지에만 몰입함)중이라고 했다. 더위를 느낄 겨를도 없이 돈 버는...
▶개별적 삶은 없다. 사람을 만나면, 사람을 만나는 일로 그치지 않고 은연중에 그의 삶에 개입하게 된다. 남의 행복을 빌지만, 막상 그가 웃고 있으면 기뻐하지 않는 게 사람 심보다. 누군가에 대해서 미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불편하고, 갈등을 만드는 게 불편하지만 타인들은 '불편한 것'들만 만들어댄다. 그런데 말본새가 세련되지 못해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 '누구답게' 살라고 하면서 정작 본인은 '인간답지' 못한 것이다. 이는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들은 시시때때로 들통이 난다. 자신의 뇌가 자신을 속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