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초(臥草·풀잎처럼 눕다) 박범신(71)이 마흔세 번째 장편 소설 '유리(流離)'를 펴냈다. 이번 작품은 44년 박범신 문학의 새로운 절창(絶唱)으로 꼽힌다. 팬클럽 '와사등(와초를 사랑하는 등대·회장 홍미애)'이 마련한 대전 출판기념회에서 작가를 만났다.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한국 사회 본질적인 문제와 동시대인의 삶을 관통해온 그는 '절대 눕지 않는' 현역작가다. -44년 간 장편 43편을 썼다. 이번 소설을 구상한 계기가 있나. "나의 오랜 귓병이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해 안 되는 말을 들어야 할 때나, 글을 써야... [나재필 기자]
▶대학시절 자그마한 시(詩) 문학상을 받고 등단했다. 객기가 넘쳐 자주 대취했고, 정신적 허방에 빠져 헤맸다. 시상(詩想)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세상을 주유하듯 긁적였다. 그러나 시는 '밥'이 되지 못했다. 도처에 가난이 보였다. 배고픈 미래가 확연히 그려졌다. 더구나 시는 쓰면 쓸수록 가식적인 언어가 됐다. 가령 '사랑은 이기적'이란 간단한 말조차도 '사랑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며 언어유희에 젖었던 것이다. 글이 글을 속이니, 위선적인 창작이었다. 시(詩) 100편을 마친 어느 날,... [나재필 기자]
▶중학교까지는 글과 담을 쌓았다. 그냥 싫었다. 쓸 말도 없었지만 일단 쓰기도 싫었다. 간혹 점수를 위해서라면 농사꾼인 부모의 말을 빌어서 썼다. 그러나 정작 말은 글로써 표현되지 않았다. 그러니 더 글이 싫어졌고 더불어 말이 괴로웠다. 하지만 학교교육은 말을 강요했고 그에 따른 글을 요구했다. 세상이 글로써, 말로써 지겨워질 즈음 개벽이 일어났다. 별안간 글이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교 국어선생님 덕분이었다. 교사는 말로 글을 가르치는 법인데, 이 분은 글로 말을 깨우치게 했다. 못써도 칭찬했고 못써도 고치지 않았다. 다... [나재필 기자]
▶밥솥에 쌀을 안친다. 손바닥을 수면에 대고 물의 양을 가늠한다. 손등 위까지 찰랑찰랑하면 좋다. 그것보다 물이 많으면 밥이 질고 적으면 되다. 찌개가 끓고 있다. 김치찌개는 오래 끓일수록 맛이 우러나고, 된장찌개는 센 불에 확 끓여야 텁텁한 맛이 줄어든다. 김치찌개든 된장찌개든 새우젓을 조금 넣으면 묘한 풍미가 있다. 나물은 소금과 깨소금으로 조물조물 무치는데 아무리 요리를 못해도 참기름을 두르면 맛이 산다. 중국요리는 파 기름, 서양요리는 올리브유만 있으면 절반은 끝난다. 천하의 백종원도 이런 간단한 레시피를 뻥튀기해서 먹... [나재필 기자]
▶개(犬)의 조상은 늑대다. 소설 같은 얘기지만 팩트다. 늑대(티베트 승냥이)가 개로 진화하는데 자그마치 1000만년이 걸렸다. 그 억겁의 세월 동안 늑대의 발톱은 퇴화됐고 사납던 성정은 꼬리를 내렸다. 늑대와 개의 차이는 길들여졌느냐, 길들여지지 않았느냐의 관점에서 달라진다. 늑대가 개가 된 것도, 개가 가축이 된 것도 순전히 사람 탓이다. 1만5000년 전 '동구 밖'에서 '집안'으로 들어온 개는 수많은 부침을 겪었다. 본색이 가축임에도 가축 지키는 일에 동원됐고 때로는 사냥견, 투견(鬪犬), 식견(食犬)의 운명을 살았다.... [나재필 기자]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눈물이 절반이다. 어머니가 짓는 끼니엔 한숨이 절반이다. 아들도, 딸도, 청년도, 노인에게도 세상의 절반은 비애다. 먹고사는 단순한 여정이 지옥 같고 감옥 같다.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칠정이 모두 울음 운다. 이렇게 답답하고 울적할 땐 꺼이꺼이 소리쳐 우는 것이 가장 빠른 치유다. 통곡에 가깝게 운다는 건 웃는 것과 같은 질감이다. '사내는 평생 세 번만 운다'는 말은 정녕 틀렸다. 어쩌면 세 번만 빼고 들키지 않았을 뿐이다. 가장(家長)의 눈물은 처마 끝 시래기에 걸려있는 빗물처럼 위태롭다... [나재필 기자]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고? 곰곰이 생각해보라. 진짜 물만 먹었는지. 혹시 너무 많이 먹어서 물을 켜는 것은 아닌가. 그것도 아니라면 무언가를 물처럼 마구 먹었을 수도 있다. 물은 0㎉로 열량이 없다. 열심히 운동했는데 살이 안 빠진다고? 살짝 뒤돌아보라. 일주일에 두 번 하면서, 그것도 땀 한 방울 안 나게 '살살' 했을 수도 있다. 밥(탄수화물) 양을 확 줄였는데 왜 살이 찌냐고 불평도 하겠지. 손에 들린 게 뭔가? 팝콘, 햄버거, 비스킷이다. 밥은 적게 먹는데 주전부리를 하염없이 먹고 있잖은가. 그럴 바엔 차라리 밥을 먹... [나재필 기자]
▶밤 11시다. 라면을 끓인다. MSG 향기가 침샘을 적신다. 이건 간식이 아니라 야식이다. 물론 둘 다 살은 찐다. 술 한 잔을 걸쳤는데 안주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던 것이 밤참의 단초다. 예전엔 깡술(강술)에도 무너지지 않았지만 요즘엔 픽픽 쓰러진다. 그래서 '사후약라면(事後藥라면)'을 먹는다. 살찔 걱정 때문에 술을 줄여본 적이 없다. 살찔 염려 탓에 야식을 참아본 적이 없다. 그냥 마시고 먹는다. 음주와 밤참이 몸에 이롭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다. 난, 결단코 내 몸을 사랑한다. ▶자, 술과 밥의 유죄 혐의를 실... [나재필 기자]
▶집 근처 도솔산은 낮아서 좋다. 가파른 오르막이 한개 뿐이다. 두개의 구릉도 부담스러운 편이 아니다. 나머지는 오솔길이어서 등산이 아니라 산책에 가깝다. 곱게 깔린 황톳길은 발바닥의 압점을 전혀 거스르지 않는다. 길 양편의 숲 또한 피톤치드의 기운을 아낌없이 뿜고, 그 기운은 사위를 감싼다. 이런 호사 덕에 최소 보름에 한 번씩은 도솔산에 간다. 산은 사계절의 표정 외에도 특별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특히 가을 산은 묵직해서 좋다. 신록이 적갈색으로 가기 전 막심을 쓰는 때라 풍경이 아주 적요하다. 깊다. 바람 또한 적당한 ... [나재필 기자]
▶신문사 일을 하다보면 하루에도 수천여건의 기사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사진도 수천 장이다. 그러다보니 읽기 싫은 거, 보기 싫은 것을 어쩔 수 없이 봐야할 때가 있다. 워낙 '쓰레기'들이라 당장 '휴지통'으로 버리고 싶지만 그런 허섭스레기 다 버리고나면 지면에 담을 게 없다. 그만큼 이 세상은 읽고 싶은 것보다는 꼴 보기 싫은 것들 투성이다. 참으로 신문 만들기 힘들어졌다. 그나마 옛날이 좋았다. 오히려 그땐 보고 싶은 거, 읽고 싶은 것만 엄선해 만들 수가 있었다. 다소 고압적이긴 했지만 '쓰레기'들을 진짜 쓰레기 취급할 ... [나재필 기자]
▶옛날엔 잘은 못 먹어도 건강하게는 먹었다. 배고픔을 잊기 위한 조·피·기장·메밀·고구마·감자는 눈물로 쪄낸 주식이었다. 이들 구황(救荒) 작물들은 생육기간이 짧고 가뭄, 장마에도 영향을 받지 않아 기근일 때도 풍족했다. 기근의 기(飢)는 곡식이 여물지 않아 생긴 굶주림을, 근(饉)은 채소가 자라지 않아 생기는 굶주림을 뜻한다. 먹을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고마움을 느꼈던 그 시절의 배고픔은 차라리 정직했다. 음식을 잘못 먹으면 폭력이다. 육체적 욕망을 갈구하게 만드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인류 유전자는 식욕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나재필 기자]
▶비가 우두둑 내린다. 하늘에 천공이 난 듯 쏟아 붓는다. 우산이 없어 대략 난감이다. 피할 수도, 피해갈 수도 없다. 아열대기후로 변한 지금, 비는 스콜처럼 내린다. 맑았다가 찌푸리고, 인상을 썼다가도 이내 주름을 편다. 그렇다고 지나가던 건물에 기댈 수도 없다. 처마가 없다. 타인의 젖은 어깨를 한 뼘도 허락하지 않는다. 우산 같은 처마는 없다. 정감이 사라진 돌덩이에서 자괴감만 느낄 뿐. 이제 비가 오면 그냥 뛰던지 맞던지 양자택일이다. 비를 맞는 것이 비를 피하는 터닝 포인트다. ▶세상엔 종잡을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 [나재필 기자]
▶닭장수에게 닭을 '봉'이라고 속여 판 희대의 사기꾼 봉이 김선달, 그가 대동강물을 팔아먹었다고 했을 때, 믿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흔한 게 물이었는데 돈을 주고 사먹는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아니었던가. 더구나 제 것도 아닌 공공의 '물'을 개인이 팔아먹는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김선달은 나루터에 앉아 물 값을 받아 챙겼고, 심지어 대동강물 전체를 4000냥에 인수하는 매매 계약까지 했다. 당시 황소 60마리를 살 수 있는 금액이다. 물론 픽션의 인물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물장수의 내력을 쫓다보면 완전... [나재필 기자]
▶북한 김정은이 미사일(ICBM 대륙간탄도)을 쏘던 새벽, 자다 말고 깜짝 놀랐다. 미사일이 무서웠던 게 아니다. 군대에 있는 큰아들이 첫 휴가를 나오는 당일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188일을 기다렸는데 행여 휴가가 취소되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물론 혹자들은 이 난리 통에 무슨 휴가타령이냐고 하겠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휴가는 휴가다. 아들은 오매불망 이날을 기다려왔을 것이다. 생애 처음 6개월 간 감금 아닌 감금을 당했으니 바깥세상이 궁금한 건 당연하다. 그 마음을 알기에 북한의 미사일은 내 심장을 겨눈 화살 같았다... [나재필 기자]
▶모든 인간에게는 일생 쓰고 죽어야하는 '지랄 총량'이 정해져있다고 한다. 김두식 한동대 법대 교수의 썰(說)이다. 어떤 사람은 그 지랄을 사춘기에 다 쓰고, 어떤 사람은 뒤늦게 찾아온 지랄을 죽기 전까지 소진한다는 게 요지다. 지랄(간질)은 단어 자체의 어감이 경박스럽지만, 법석 떨며 얄궂게 하는 행동을 빗댄 순우리말이다. 한마디로 발작이다. 이왕 '지랄' 얘기가 나왔으니 한 번 더 복습하면 지랄은 끝까지 지랄해야 끝이 난다. 지랄 같은 일들이 쌓이면 숨이 턱턱 막혀오고 흔적이 남는다. 지랄병은 사회가 미쳐 돌아가기 때문에 ... [나재필 기자]
▶옛날엔 버릴 것이 거의 없었다. 모든 것은 자연에서 출발해 자연으로 돌아갔다. 나무와 돌, 흙으로 만든 집은 부서지면 다시 흙의 품에 안겼다. 먹다 남은 음식물도 동물의 먹이로 현신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는 완전한 소진이자 재탄생의 윤회였던 것이다. '쓰레기'라는 말은 근대화 이후 나일론, 비닐, 플라스틱, 콘크리트를 사용하면서 시작됐다. 쓰레기가 많다는 것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찌꺼기다. 일찍이 지금보다 더 따뜻한 겨울을, 지금보다 더 시원한 여름을 보낸 적은 없었다. 물질문명의 다양한 이기(利己)를 많은 사람들... [나재필 기자]
▶"아, 월급쟁이 못해먹겠다. 나도 장사나 한번 해볼까. 장사하는데 임자가 따로 있나." 직장 스트레스에 찌든 월급쟁이라면 한번쯤은 상상해봤을 법한 그림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결심이 잔인한 결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괜찮은 사업 아이템 잡아서 점포만 차리면 '대박'이 날 것 같지만, 현실에 부딪혀보면 '쪽박' 찰 확률이 더 크다. 보통의 사람들은 '사업'에 '돈'을 맞추지 않고, 가지고 있는 '돈'에 '사업'을 맞추기 때문이다. 망하는 집(터)은 항상 망하는 이유가 있다. 시장조사는커녕, 앉아서 계산기만 두드리다 뛰어드니 ... [나재필 기자]
▶아침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비가 내린다. 여명의 빗물은 달디 달다. 비가 올 때는 여운이 더 깊은 법이다. 적당한 습기는 생각의 침전을 통해 부풀려진 상황을 최적화시킨다. 어둠속에서 달린다는 건 약간의 두려움을 동반하기도 한다. 일단 짐승보다 사람이 무섭다. 성큼 지나치는 사람의 그림자는, 짐승의 그림자를 닮았다. 그래도 달린다. 달리는 일은 이제 가장 익숙해져버린 감정이 돼버렸다. 최소한 뛰는 동안만큼은 편하다. 상황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적극적으로 몰입하기 위해서다. 고통을 생각하면, 생각하는 그 자체... [나재필 기자]
▶사람의 두 발에는 52개의 뼈와 38개의 근육, 214개의 인대가 있다. 몸 전체 뼈 206개의 약 4분의 1이 모여 있는 셈이다. 발가락들은 ‘발’로서의 개별성이 아니라 ‘몸’을 지탱하는 객체로서의 보편성을 띤다. '발(足)'은 보직만큼이나 견뎌야할 고통도 크다. 딱딱한 바닥에 발을 내딛는 순간 체중의 1.5배에 이르는 충격이 고스란히 52개의 뼈에 전달된다. 발에 전달된 자극은 발목과 무릎, 척추를 거쳐 전신으로 퍼진다. 보통 1.5㎞를 뛴다면 발뒤꿈치는 땅바닥에 1000번 정도 닿는다. 42.195㎞를 뛰려면 최소 66... [나재필 기자]
▶조선이 몰락하는 마지막 100년은 '민란(民亂)의 시대'였다. 19세기 여명을 여는 1800년, 개혁정치를 펼치던 정조의 죽음과 함께 민중들은 거칠게 깨어났다. 관서 농민전쟁(홍경래의 난)을 비롯해 삼남 농민봉기(진주민란), 광양 민란, 동학농민혁명 등이 잇따라 봉기했다. 원인은 크게 세 가지. 지방차별정책, 세도정치에 의한 권력독점, 가혹한 조세와 수탈이었다. 민란이 삼남지방(충청·경상·전라)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까닭은 '삼정(토지세·군세·지방세) 문란' 때문이다. 탐관오리들은 규정보다 조세를 많이 걷었고, 심지어 어린아이... [나재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