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국내·외 깊은 애도물결 … ‘국민장’ 치를듯

15대 대통령을 지낸 한국정치의 거목 김대중(85)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3분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페렴으로 이 병원에 입원해 집중치료를 받아왔지만 폐색전증이 발병하는 등 병세가 악화돼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한 달여 넘게 치료를 받아왔다.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이날 오후 기자회견을 갖고 "김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3분 서거하셨다"며 "부인 이희호 여사와 홍일·홍업·홍걸 3형제와 며느리 등 가족과 측근들이 임종을 지켜봤다"고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거 직후 이동관 대변인을 통해 "큰 정치지도자를 잃었다. 김 전 대통령의 생전의 뜻이 남북화해와 국민통합으로 이어지기를 기원한다"고 애도했다.

정부는 김 전 대통령 장례형식과 절차 문제 등 후속조치에 돌입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25년 전남 신안에서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 씨의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목포 북교초등학교와 5년제인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목포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민주당 대변인이었던 63년 목포에서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뒤 7, 8, 13,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나서면서 대권 도전을 시작했던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1992대선에서 연거푸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했지만 이후 정계에 복귀해 1997년 DJP(김대중+김종필) 연대를 기반으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돼 ‘3전 4기’라는 말을 낳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72년 유신체제 등장 후 87년 6월항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기 전까지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반체제 인사로 분류돼 잇따라 투옥·수감되고 해외망명생활을 하는 등 숱한 고초를 겪었는 데 이 때문에 혹독한 추위를 이기는 뜻에서 ‘인동초’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특히 80년 5·17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조치 때 학생 소요사태의 배후 조종 혐의로 구속된 후 광주민주화운동을 사전 지시했다는 내란음모 혐의로 그 해 7월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1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으나 국제사회의 압력 덕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었다.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재임 중 국난으로까지 불렸던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IT를 기반으로 한 벤처열풍을 불게해 우리나라 경제체제를 바꿨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울러 재임기간 중 평양을 직접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을 갖고 남북화해 협력의 기초를 닦았고 그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국민들의 자긍심을 고취했다.

김 전 대통령은 최근에도 ‘6·15’ 정상회담을 기념한 강연 등에서 남북화해 협력을 강도 높게 촉구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러나 수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친인척 비리와 인사편중 시비, 대북 햇볕정책을 둘러싼 보수층과의 갈등으로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퇴임 후에도 대북비밀송금과 국가정보원의 불법 도청사건으로 측근들이 기소되는 등 파란만장한 영욕의 삶을 살아왔다.

김 전 대통령 서거로 지난 1960년대 이후 한국정치를 주도했던 김영삼, 김종필 세 사람의 ‘3김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서울=김종원 기자 kjw@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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