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근 한국유교문화진흥원장

1606년 율곡 이이의 적전(嫡傳, 제1의 제자)인 59세의 사계 김장생은 금강의 절경이 내려다보이는 옥녀봉 중턱(현 충남 논산시 강경읍)에 임리정을 지었다. 이곳에서 그는 동료 후학들과 함께 공부하고 강학하면서 20여년 전 타계하신 스승, 율곡을 모시고 제향하는 서원 건립을 논의했다. 20여년의 노력 끝에 1626년 드디어 임리정에서 우측으로 수십 발짝 떨어진 산기슭에 죽림서원을 건립할 수 있었다. 스승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살고 싶었던 그는 그토록 존경하는 스승을 오른손으로 부축하듯 모시면서 행복하게 여생을 살았다.

1663년 57세의 우암 송시열은 죽림서원 오른쪽, 임리정에서 100여 미터 위쪽에 팔괘정을 세웠다. 14년 전 스승 사계를 죽림서원에 모신 그는 이곳에서 스승과 스승의 스승인 율곡을 왼팔로 감싸 모시며 두 분 스승을 그리면서 공부하고 강학하기를 원했다. 사계가 지은 임리정과 우암이 지은 팔괘정은 모양과 크기에서 놀랄 만큼 똑같아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에 정자까지도 스승과 닮고 싶었던 제자의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지금도 죽림서원은 임리정과 팔괘정을 좌우 날개 삼아 제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금강과 서해를 보며 비스듬히 날고 있다.

400여년 이상 세월이 흐른 1958년, 논산 강경고등학교 적십자청소년회 학생들은 퇴직한 선생님들을 위문하기 시작했다. 이 스승 존경 활동은 1964년 ‘스승의날’로 발전했다. 그리고 매년 임리정에서는 돈암서원이 주관하는 스승 존경 학생 백일장이 열린다. 강경고 학생들이 임리정과 팔괘정, 죽림서원에 깃든 스승과 제자의 사랑 이야기를 알았는지, 아니면 그들의 행동에 유교의 인성교육이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한 공간에서 수백년의 시간을 거쳐 같은 문화적 행동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시대에 따라 그 공간을 주도했던 문화는 바뀐다. 그러나 과거의 문화와 바뀐 현재의 문화 사이에 연결고리가 없다면 그 공간은 과거의 문화를 그저 박제처럼 죽은 생명으로 박물관에 전시할 뿐이다.

그러나 강경은 400여년에 걸친 이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와 그의 실천을 통해 조선시대, 개항과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한 공간 속의 여러 문화가 수백 년간 단절되지 않고 연계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이 스승과 제자 이야기는 우리에게 유교문화, 상인문화, 기독교·천주교 문화, 근대건축문화 등 다양한 강경의 문화들이 이질적으로 격리되지 않고 시대를 통해 서로 연계돼 현재의 일상에 살아 있는 문화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다. 이런 취지에서 한국유교문화진흥원, 충남도, 논산시는 내년부터 우선 논산을 주 무대로 "K-유교문화제"를 시작한다. 연산, 노성과 함께 문화제의 주요 공간이 될 강경에서 수백년 시간의 흐름표 위에 다양한 문화가 개성을 지닌 채 더 좋은 맛을 내는 샐러드처럼 "따로인 듯 하나로" 존재해 온 여전히 신선한 ‘문화샐러드’를 즐기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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