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광 3·8민주의거기념관건립추진위원장

1930년 3월은 엄혹한 시기였다.

당시 자유당정권은 제4대 대통령과 5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당의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는 등 혈안이 돼 있었다. 그러나 부정과 부패 장기집권에 신물이 난 시민들의 불만과 원성은 하늘을 찌를 듯 했고 무거운 분위기와 긴장감 속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첫 화살이 2월 28일 대구에서 쏘아 올려졌다. 이어 3월 8일과 10일 대전에서의 두 번째 화살이 마산 등 전국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가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3·8이 4·19혁명의 초석이 되고 우리나라 민주발전의 큰 획을 긋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는 계기가 됐으나 3·8은 오랜 기간 상기하는 사람이 없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릴 뻔했다. 40년이 지나고서야 기념사업회를 발족했고 기념식은 물론 세미나와 심포지엄을 통해 각종 관련 서적 등을 발간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8년 11월에는 3·8이 국가기념일로 지정 공포됨으로써 대구의 2·28, 마산의 3·15 그리고 4·19와 함께 4·19혁명의 4대 기념일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이를 계기로 2019년 당시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첫 기념식에 국무총리가 참석해 3·8기념관 건립을 약속하면서 기념관 건립이 가시화됐고 드디어 지난해 2월 대전 중구 선화동에 착공해 하반기 개관할 예정이다.

실로 의거 64년 만의 일이다.

그러나 당초 기념사업회가 계획했던 부지 4000여평 건평 5000평 규모보다 축소돼 아쉬움으로 남는다. 3·8의거 정신을 시민정신으로 계승 발전 승화시키기 위한 각종 사업이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축소되거나 제때 추진되지 못하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이외 3·8은 순수 학생운동으로 대전시교육청 협조와 지원이 필수적이지만 이 역시 현실적으로 도움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4·19 혁명의 단초 역할이었던 민주의거임에도 유공자가 타 지역에 비해 적다. 1600명 가량이 참여한 민주화운동임에도 국가유공자로 인정된 사람은 11명 뿐으로, 홀대받고 있다. 뉴스, 신문 등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여럿 유공자들은 몸도 마음도 상처만 남은 채 세상을 떠나고 있다. 3·8 기념사업회는 지난 24년 동안 온갖 어려움과 난관 속에서도 꿋꿋하게 3·8정신 구현을 위해 노력해 왔다.

3·8 기념사업회는 자유 정의 민주의 기치아래 앞으로도 그 가치를 후세에 계승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아울러 시민들의 자발적인 동참과 관계 당국의 분발도 촉구해 본다.

3·8정신은 영원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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