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교· 대전본사 교육문화부 기자

[충청투데이 조선교 기자] "3·8 민주의거요? 처음 들어봤는데요."

대전의 한 대학생이 충청권 최초의 학생 운동에 대해 묻자 이렇게 말했다. 그는 경상도 출신이었고 지난달 대학 생활을 위해 처음 대전을 찾았다. 학생은 경남 마산에서 일어난 3·15 의거를 잊지 않고 있었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민주역사의 한 축으로 기억됐다.

나 또한 그랬다. 성인이 돼 타지에서 대전을 찾기 전까지, 기자가 돼 지역 사정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3·8 의거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교과서에서 잊힌 3·8 의거는 생소했다. 그리고 여전히 타 지역 학생들은 이러한 역사를 알지 못한 채 자라나고 있다.

"우리의 과업, 그때의 운동은 우리 세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속세대로 이어져야 한다."

의거에 참여했던 김용재 3·8민주의거기념사업회장은 당시 대전지역 학생들이 가졌던 의지와 과업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근심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들은 단순한 기록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사회를 지탱할 기틀이자 원동력이 된다. 그러나 현 시점에선 교과서에 조차 언급되지 않은 역사로 남았고 국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은 이도 단 5명에 그쳤다. 당시 의거 현장에는 대전고와 대전상고 학생 등 1600명 이상이 민주주의를 위해 발벗고 나섰고 100명 이상이 경찰에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곤봉 세례로 장애를 안고 살게 된 학생 송병준과 학생들을 보호하려다 고초를 겪은 선생 조남호, 금종철조차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날 현장에 모인 이들이 대전 민주역사를 새롭게 썼지만 국가적으로는 언급이 되지 않고 있다.

3·8 의거의 역사가 교과서에 실리지 못한 배경과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수많은 이들이 남게 된 이유는 공통적으로 ‘정확한 조사’에 있다. 교과서 검정을 위한 준비도, 공적을 인정받기 위한 과정에도 객관적 자료와 조사가 필요하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3·8 의거가 2018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이후에는 30명 이상이 공로를 인정받기 위해 포상을 신청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시위 계획과 과정 등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사실이 객관적 자료에서 확인되지 못했다는 게 국가보훈처의 설명이다. 3·8 의거의 현장 자료와 물품들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방치되거나 사라져갔다. 현재 기념관을 조성하기 위한 자료 수집과정에서도 어려움이 예상되고 있다.

국가가 나서 그날의 함성을 기념하기로 하면서 3·8 의거의 위상은 살리게 됐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과업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기 위해선, 아직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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