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래 국회의원

지난 6월 28일 진행된 ‘2023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나눠먹기식 R&D 예산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R&D 예산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도록 요구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과학기술계는 아수라장이 됐다. 올해 초부터 많은 전문가와 공무원들이 검증해 마련한 내년도 예산안은 하루 아침에 휴지 조각이 됐다. R&D 예산은 ‘과학기술기본법’에 따라 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를 거쳐 6월 30일까지 기획재정부에 보내야 한다. 초유의 예산 백지화 사태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시한을 지키지 못해 법률을 위반하게 됐다.

연구 현장은 더 큰 혼란이다. 오랜 시간 고심해 내놓은 연구 과제 사업들을 별다른 기준도 없이 삭감해야 하고 대통령 입맛에 맞는 예산안을 짜내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경상비마저 삭감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짜여진 예산이 어떻게 미래 경쟁력을 담보할 수 있겠는가?

특히 대통령이 강조한 R&D 국제협력 예산을 대폭 확대하기 위해 비상이라고 한다. 국제협력은 상대가 있는 사업이다. 어떤 연구를 어느 국가 및 연구자와 해야 서로에게 도움이 될지 장시간 협의하고 논의해야 한다. 또한 예산을 편성하려면 다른 국가와 상이한 회계연도도 고려해야 한다. 이처럼 장기적인 안목으로 추진해야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 사업을 단 며칠만에 뚝딱 만들어내려고 하니 얼마나 사업이 졸속으로 만들어지겠는가. 대통령실에서 이번 가이드가 얼마나 근시안적인 지시인지 지금이라도 깨달아야 한다. 필자는 지난 달 국회에서 ‘사상초유의 R&D 예산 백지화,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긴급 간담회를 개최해 연구 현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연구자는 연구비 재조정 과정에서 최초로 기획된 연구가 기형적인 형태로 축소돼 해당 사업 자체가 실패할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한국전기연구원 연구자는 국제공동연구 제안서를 1시간 내로 제출하라는 압박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한 출연연은 올해 하반기에 남은 경상비 일부를 감액하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이런 황당한 일이 지금 전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R&D 예산에 문제 의식을 느낄 수는 있다. 그렇다면 예산 편성 초기부터 편성 지침에 국정 기조를 반영하고 예산 편성 과정을 꼼꼼히 점검하는 것이 순서다. 이미 마련된 예산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라는 지시는 무책임하고 부정적 파급력이 너무 큰 행위다. 과학기술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해묵은 과제들이 많다. 연구자들은 단기 성과에 치중하게 만드는 연구과제중심제도(PBS)부터 손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지 못한 채 과학기술계를 카르텔로 매도하며 적대시하는 것은 과학기술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도 전세계 열강이 기술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대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기술패권시대에 핵심 전략 기술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면 국가의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지금은 연구자들이 어떤 조건하에서 더욱 창의롭고 자유롭게 연구하고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시기다. 윤석열 정부가 보다 미래지향적인 시각으로 과학기술계를 바라보길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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