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한국언론진흥재단 전 이사장

국민이 대표자를 선출해 국가 의사와 정책을 결정케 하는 정치적 대의제(代議制)에 대한 루소(JJ Rousseau 1712~1778)의 비판은 신랄하다. 그는 저 유명한 ‘사회 계약론’에서 "영국의 인민들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의원을 선거하는 기간뿐이다.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되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라고 주장했다. ‘인민’, ‘자유’와 ‘노예’ 그리고 ‘선거’를 병치해 서술한 이 문장이 주는 인상은 너무나 강렬해 3세기가 흐른 지금까지 민주주의와 선거를 얘기할 때마다 인용되고 있다.

‘대의제 정치하에서 국민은 선거 때만 가치 있는 존재’라는 루소의 말에 동의하든 말든 우리는 요즘 정말로 ‘주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4. 10총선 유세 현장에 가보면 맨땅에 엎드려 큰절하는 ‘머슴’의 모습을 보는 게 전혀 낯설지 않다. 여당 후보들은 "그동안 우리가 잘못했다. 앞으로 정말 잘하겠다."라며 사과하느라 여념이 없다. 심지어 한 후보는 죄수를 실어 나르던 옛 함거(檻車)의 쇠창살 안에 삭발하고 올라 "윤석열 정부에 대한 분노와 심판의 마음을 잘 안다. 시민 여러분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죄송할 뿐"이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보인다. 오만 독선 불통으로 치달으며 상처받은 국민을 다독이긴커녕 부아만 돋운 정부에 브레이크를 잡는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성이다.

한동훈 국민의 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간다. 그는 "저희는 국민이 요구하면 다 듣는다."라고 유세하고 다닌다. 언론인 회칼 테러를 들먹여 방송사를 겁박한 황상무 대통령 시민사회수석을 ‘끝내’ 사퇴시켰고, 해병대 채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피의자로 출국금지 대상자인 이종섭 전 장관을 호주대사로 발령내 출국시킨 것을 ‘결국은’ 불러와 물러나게 했다고 내세운다. ‘인사권자의 완강한 뜻‘을 자신의 건의로 굽혔고 선거 후에도 이처럼 국민 목소리에 복종하겠다는 것이다. 국민 다수가 대통령 잘못을 지적할 때도 궤변으로 변명하며 옹호에 급급했던 게 엊그젠데 이제는 국민 목소리만 귀담아듣겠노라고 자세를 낮추는 모양새다.

정부와 여당이 한 몸이 아닌 양 선을 긋는 이런 행태는 사실 충분히 예견됐던 일이다. 보장된 임기가 3년 남은 윤석열 대통령과 달리 당과 국회의원 후보들은 당장 ‘국민의 표가 곧 목숨’이다.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있는 대통령에 기대어 있을 이유도, 여유도 없다. 오히려 정부 여당이 사는 길은 "윤 대통령이 국민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는 것이며 내각과 대통령 참모들이 총사퇴하는 것"이란 말까지 나올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정치권 일각에서 ‘탄핵’이니 ‘탈당’ ‘하야’ 단어가 나돌았던 만큼 앞으로 본투표까지 남은 일주일 또 어떤 요구가 분출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 됐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 현상은 윤 대통령이 자초한 것이다. 그는 "특검을 거부하는 자가 범인"이란 말을 만들어내고도 자기 부인에 대한 특검법안은 특권으로 거부했다. 입버릇처럼 외던 ‘공정’과 ‘상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경제는 곤두박질, 물가는 천정부지, 민생은 최악인데도 ‘이념’을 앞세워 ‘전 정권 탓’을 하고 ‘편 가르기’, ‘내 편 심기’에 골몰했다. 대형 참사 책임도 수족은 감싸고 유족의 진상규명 요구는 ‘정치공세’로 내몰았다. 야당과 대화는 거부하고 검사가 범죄자 대하듯 다그치며 적대시했다. 국회의원이건 누구건 대통령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할라치면 ‘입을 틀어막아’ 끌어냈다. 언론이 잘못을 지적하면 되레 갖가지 제재를 덮어씌웠다.

그래서일 것이다. 윤 정부 2년 만에 한국은 "민주화에서 독재화로 전환이 진행되는 국가"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V-Dem)는 2024 연례 보고서에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지수는 2019년 0.78점(18위), 20, 21년 0.79점(17위)을 기록하다 윤 정부가 들어선 22년 0.73점(28위)으로 떨어졌고 지난해 0.60점, 47위로 추락"했다고 밝혔다. 또 한국을 "언론의 대정부 비판이 위축된 20개국 중 한 곳"으로 지목하며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침해받는 일이 가혹한 독재 국가만의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고 꼬집었다. 더욱 참담한 것은 "한국처럼 영향력 있는 글로벌 강국의 독재화는 다른 국가에 영향을 미쳐 독재화 물결을 가속화 할 수" 있다며 한국발 독재의 전염 우려까지 내놓았다는 점이다. 최단시일에 민주화를 이루어 세계 경제 강국으로 우뚝 섰다는 자부심이 일거에 무너져내린 것이다.

사실 외국의 평가는 몰라도 국내 불만은 다소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는 기회가 윤 대통령에게 없진 않았다. 국민의 힘 비대위에서 대통령 부인 사과 요구가 나왔을 때, 또 2월 KBS 대담 때 대통령이 완곡하나마 ‘사과 의향’을 비쳤더라도 상황이 이렇게 번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3백만 원 명품 가방을 받은 명백한 사실을 ‘몰카 함정’으로만 몰아치고 ‘부인과 다툼 한번 없었다’고 웃어넘긴 순간 국민의 마음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유야무야 얼버무리는 사이 황상무 이종섭 사건이 터졌고 그마저 엉거주춤,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는 분노를 샀다는 얘기다.

치열한 선거 판세로 여당 내 위기감이 고조될수록 어떤 형태든 대통령이 사과 사죄해야 한다는 요구는 더 많이 분출될 것이다. 또 전혀 마음에 없는 말뿐인 사과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얘기도 나올 것이다. 일각에선 벌써 대선 후보 시절 윤 대통령이 마지못해 한 ‘사과’와 바로 SNS에 올린 ‘사과 먹는 개’ 사진의 일화를 떠올리기도 한다. 당시 윤 후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를 잘했다는 분도 있다. 호남분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이 꽤 있다"고 말해 엄청난 반향이 일었다. 처음엔 말뜻이 왜곡 전달됐다면서 사과를 거부하던 윤 후보는 이틀 만에 사과하면서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토리에게 ‘인도 사과’를 주는 사진을 게시, "사과는 개나 주라는 뜻 아니냐."란 더 큰 논란을 불렀다.

짧더라도 뒤끝 없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하라는 주문을 윤 대통령은 오래전부터 받아 왔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독재화의 길로 들어섰다는 지적과 언론 자유 침해에 대한 사과만은 정말 진지하게 해주면 좋겠다.

※이 기고는 지역신문인 영남일보(대구·경북), 중부일보(경기), 무등일보(광주·전남)와 함께 게재됩니다. 사외(社外)기고는 본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