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충청투데이 최소리 기자] 선택과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다. 사람들은 선거를 민주주의의 축제라고 말하지만, 이 축제가 온갖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는 개판이 된 지 꽤 오래되었다. 우리의 미래를 위협하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음에도 이 문제에 대한 정치적 담론과 정책 대결은 사라지고, 심판론이 총선 판을 휩쓸고 있다. 4년마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선거에 투표는 하고 싶은데 뽑을 정당이 없다는 아우성이 일어난다. 윤석열도 싫고 이재명도 싫다. 한동훈도 싫고 조국도 싫다.

모두 싫은 데도 우리는 선택할 수밖에 없다. 뽑을 정당이 없는 상태에서 선택을 강요당한 국민은 역설적으로 그토록 싫어하는 양당 제도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인가? 민주주의 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지속 가능한 민주주의의 핵심적 지주인 시민의 민주 의식이 부패하였기 때문인가?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적 통찰로 유명한 윈스턴 처칠의 말이 떠오른다.

"지금까지 시도됐던 다른 통치 형태를 모두 제외한다면, 민주주의는 최악의 통치 형태다."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을 보면 한국 민주주의는 ‘최악’이 분명하지만, 민주주의 제도는 그래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의 보수당은 1945년 7월 총선에서 압승할 것이라는 예측과는 달리 노동당에 정권을 빼앗기는 역대급 참패를 당했다. 민주주의 제도에서 선거는 종종 예상을 뒤엎는다. 선거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푸틴의 당선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사전에 결정된 전체주의 정권의 선거와는 다르다. 왜 당시 영국의 시민들은 처칠의 공적을 인정하면서도 전혀 다른 선택을 한 것일까? 우리의 총선이 어떤 결과를 보여줄지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다는 게 민주주의 제도의 미덕인지도 모른다.

국민은 정권을 띄우기도 하고 가라앉게도 한다. 국민은 도덕적으로는 이미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어야 마땅한 사람도 다시 불러와 부활시키기도 한다. 국민은 한 마디로 변덕스럽다. 찍을 정당이 없다면, 시민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할까? 이래도 저래도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무조건 선택하는 찐 보수나 찐 좌파의 성향을 일단 제쳐두기로 하자. 그들의 기준은 어차피 ‘소속’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정당과 집단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이념과 정책을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우리의 정치판을 요동치게 만드는 것은 중도이다. 중도는 적어도 우리가 잘살려면 ‘이런 나라’를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는 상식에 기반하여 정책과 인물을 가늠한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집단이다. 조국 열풍이 부는 데도 제3지대가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보면, 중도의 합리성도 감정에 침식되어 파열된 것처럼 보인다. 찍을 정당이 없다는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중도의 선택 기준이 ‘차선’과 ‘차악’이라는 감정적 기준으로 축소된 것처럼 보인다. 차선은 최선의 다음이고, 차악은 최악보다는 덜 나쁨이다. 우리가 선택할 최선이 없다면, 차선과 차악은 유일한 대안이다. 그런데 ‘차선의 선택’과 ‘차악의 선택’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상적인 후보자가 없어 최선 대신에 차선을 선택할 때, 우리는 가능한 옵션을 평가하고 자신의 가치나 선호도에 부합하는 옵션을 선택한다. 예컨대 사람은 못마땅해도 그가 추구하는 정책이 가장 큰 이점을 제공하거나 가장 적은 피해를 제공한다면, 우리는 차선을 선택하여 긍정적인 결과를 극대화하려고 한다.

반면에 ‘차악의 선택’은 사용 가능한 옵션을 비교하고 두 옵션이 모두 이상적이지 않더라도 덜 해롭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옵션을 선택한다. 윤석열·한동훈이 이기면 나라가 망한다거나 이재명·조국이 득세하면 나라가 끝장이라는 네거티브 유세가 판치는 선거에서는 차선보다는 차악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서로를 악이라고 비방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덜 사악한 옵션을 선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쩔 수 없이 차악의 옵션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기준을 무심코 낮출 수 있다는 점이다. 덜 나쁜 것을 반복적으로 선택하면 기대치가 점차적으로 낮아진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인식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을 불러온다. 사람들은 두려움, 좌절, 환멸로 인해 인물과 정책에 투표하기보다는 ‘반대투표’를 할 수 있다. 유권자는 실제 선호도와 일치하지 않더라도 덜 싫어하는 후보자를 전략적으로 지지함으로써 수준 이하의 부정적 선택의 순환을 영속시킬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은가? 어떤 정당과 정책이 이런 나라의 실현에 도움이 되는가?

‘차선의 선택’은 이 물음에 대해 적어도 자신의 기준을 되돌아본다. 내가 원하는 가치와 정책이 무엇인지 검토한다. 그런데 우리가 끊임없이 덜 악한 ‘차악’을 선택하다 보면, 정치에서 개혁과 혁신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당선되더라도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 분명하다면, 현상을 유지하고 대안의 목소리를 억제하려는 경향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나쁜 정치 문화는 계속 나빠지고, 개선되지 않는다.

우리는 ‘차악’보다는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 인간은 본래 긍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본능을 갖고 있다. 행동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에 의하면 질병에 대한 두 가지 대응이 제시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구할 확률이 1/3이고 아무도 구할 수 없는 확률이 2/3인 좀 더 뻔한 대안보다 확실히 200명을 구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한다. 첫 번째 옵션을 선택하면 400명이 확실히 죽는다. 통계의 기만이지만, 우리는 사람을 확실히 구할 수 있다는 옵션을 선호한다.

어느 정당이 우리에게 확실히 긍정적인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면, 우리는 차악보다는 차선을 선택할 것이다. 차악의 선택은 감정에 쏠리고, 차선의 선택은 합리적 평가를 추구한다. 우리가 좋은 정치 문화를 만들려면 합리적인 평가와 정서적 반응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단순히 해악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과 가치, 그리고 더 큰 이익을 바탕으로 투표해야 하는 이유이다. 불완전한 옵션 중에서 선택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차선과 차악의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면 우리는 더 사려 깊은 선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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