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원기 서산시의회 산업건설위원장

지난 10월 서산시의 대표 축제인 제20회 해미읍성 축제가 25만 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이를 바탕으로 해미읍성 축제는 충남권 축제로는 유일하게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정한 ‘로컬100’에 이름을 올리는 쾌거를 거뒀다.

그렇다면 해미읍성은 어떤 곳일까?

해미면 휴암리 유적지를 살펴보면 해미는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계속 거주한 곳이라 볼 수 있다.

삼국 시대 해미면은 백제에 속했으며 고려 때에는 지역 관리인 한씨(韓氏)가 건국에 큰 공을 세우자 왕건은 그에게 벼슬을 주고 정해현(貞海懸)을 설치, 그의 관향으로 삼게 했다.

당시 서산에는 정해현, 여미현, 부성현, 지곡현이라는 4개의 현으로 나뉘어 있었고 해미(海美)라는 지명은 조선 태종 7년 1407년에 정해현에서 해(海)자를 따고 여미현에서 미(美)자를 가져와 해미로 불렸다.

1418년 태종은 해미현에 충청병영을 설치해 충청도 육군 최고 지휘자인 병마절도사를 뒀다.

청주로 옮기게 되는 1651년까지 233년 동안 해미는 군사·행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579년에는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했으며 1791년 신해박해 때는 다산 정약용이 열흘간 유배를 왔던 곳이다.

조선 후기 해미진영(海美鎭營)은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임무를 맡아 1866년 병인박해 후 해미에서 1000여 명의 신자들이 생매장을 당했다.

해미 지역은 1894년 동학혁명 당시 홍주성 전투 참전 및 1905년 을사조약 후 홍주성 전투의 군량미 지원 등의 의병 활동에도 적극 가담했다.

1919년 3.1 만세 시위에도 활발히 참여했는데 해미면 서기인 이계성과 김관용 주도로 해미시장 등에서 주민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 날 시위로 200여 명의 주민들이 일본 경찰들에 의해 체포됐다.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미를 방문한 데 이어 2021년 국제성지로 선포됐다.

이렇듯 해미는 우리나라 역사의 변혁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 왔으며 시대적인 고난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정신적인 지주였다.

오늘의 화려한 해미읍성축제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 해미가 가진 역사적인 정체성을 제대로 찾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해미를 알아가는 과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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