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우 충남의병기념관홍성군민간유치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한국은 집권자가 나라를 지키지 못할 때 국민이 직접, 나서 나라를 구하고 국권을 회복한 대표적인 나라이다. 전제정치 시대에는 왕이나 대신들이 나섰지만, 공화정 시대에는 대통령과 집권층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했다. 그 때문에 커다란 궁궐과 부, 명예 그리고 특권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국민이 용인했다. 그러나 구한말 왕과 집권층은 국가와 국민의 안전이나 집권층의 특권 보장 사이에서 국가와 국민을 버리고 집권층의 특권을 선택했다. 을사5적, 정미7적이 그래서 나오게 되었고 결국, 대한제국의 국권은 ‘경술국치’ 조약 한 장으로 일본에 넘어갔다. 홍주의병은 왕과 집권층이 나라와 국민을 지키지 못한 때 백성이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나 일어나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전국 최대, 최고의 의병항쟁이었다. 1896년 11월 제1차 홍주 의병은 동학 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폐정개혁을 통한 국가 쇄신보다 왕권에 위협을 느낀 국왕 고종이 동학 농민들을 토벌하여 왕권을 지키고자 청국군을 끌어들인 데서 발단이 되었다. 고종이 국가 위기에 외국군을 끌어들인 것이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에 이어 세 번째였다. 청국군이 조선에 파병하자 일본이 이를 빌미로 일본군을 파병하면서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청국을 꺾은 일본은 조선을 장악하여 일본에 반대하고 러시아 쪽 도움을 구하는 왕비 민씨를 경복궁에 불법 침입하여 시해했다. 왕과 신하가 위기에 빠뜨린 나라를 구하기 위해 홍성의 김복한, 이설, 홍주향교 전교 안병찬 등의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켰고 청양의 선비들이 이에 합세하여 홍주성을 점령했다. 김복한은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충남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 내 27개 면에 통문을 띄워 의병을 초모했다. 그러나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지도부가 체포되어 1차 홍주 의병은 실패하고 말았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조약을 강요했다. 이완용 등 대신들이 이에 협력하여 외교권을 넘겨주고 대한제국은 껍데기만 남은 국가로 전락했다. 망국이 눈앞에 다가오자 홍성을 비롯한 내포지역 유생과 주민들이 다시 일어났다. 홍주의 안병찬, 박창로, 이세영 등은 1906년 3월 11일 정산의 전)참판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부여의 지치에서 의병을 결집하여 남포전투에서 승리하고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했다. 의병 전쟁의 역사에서 이와 같이 큰 승리를 한 역사가 전국에서 없었다. 조선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홍주 의병을 방치할 경우 전국으로 파급되고 조선의 식민지화가 큰 난관에 봉착할 것을 우려하여 공주의 경찰대, 수원의 헌병부대를 증파하여 홍주성을 무참히 공격했다. 그러나 홍주성 안의 의병이 공격을 막아내며 성을 굳게 지켰다. 이에 다시 조선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에게 명하여 용산에서 보병 2개 중대, 기병 반개 소대, 전주수비대 1개 소대를 증파하여 경찰과 헌병, 진위대 합동으로 홍주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결국, 막강한 화력을 동원한 일본 정규군의 총공세에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후일을 기약하며 흩어졌다. 홍주의병은 충남인의 선비정신, 주인정신 그리고 의리정신과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상징한다. 홍주성 전투 후 체포와 참살을 면한 의병들은 다시 청양, 서산, 당진 등의 서해안 지역과 공주, 논산, 연기, 대전 등 계룡산 일대 산악지역, 경기도와 전라도 지역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당진 소난지도 의병도 그중 하나였다. 홍주성 의병 전투는 전국에서 가장 크고 치열한 의병항쟁이었다. 또한, 홍주성 전투 참여자들은 1910년대 최대 비밀결사 독립운동 단체인 광복회에 참여하였으며 3.1운동과 이후의 윤봉길 의사 등의 의열투쟁으로 이어갔다. 즉 홍주의병은 충남인의 선비정신, 주인정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의리정신과 한국인의 독립정신의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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