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택 청주교육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 보통 제 나이보다 젊게,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인용구로 쓰이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나잇값을 제대로 못한다는 뜻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최근 각종 언론 매체에서 한 남자배우의 연애사가 폭로되면서 한동안 갑론을박 시끄러웠다. 평소 선한 이미지의 배우였기에 본인의 이미지 실추는 물론 광고나 차기작까지 불투명해졌다는 보도가 연일 이어졌다. 폭로된 당사자는 조용한데 주변에서 더 극성으로 '~카더라' 통신을 남발하니 역시 연예인은 이미지와 실생활은 다르다는 평으로 귀결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폭로 내용과 사뭇 다른 이야기들이 쏟아지면서 비난 여론은 잠잠해지고, 배우에 대한 동정 여론으로 상황은 반전이 되었다.

다 큰 어른의 연애사, 사생활에 누가 옳고 그름을 탓하기 전에 '나이를 제대로 먹는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부정적인 감정 상태를 참지 못하고 폭로한다고 해서 갈등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고, 결국 모두가 패자가 되는 게임이 될 뿐이다.

악의적인 말과 비난을 쏟아내는 글로 상대를 공격하고, 그에 대한 반론, 재반론으로 도배되는 일은 비단 이 사건만이 아니다. 대선을 앞둔 정치 쪽에서도 상대방에 대한 원색적인 말과 글은 넘쳐나고, 어느새 '정치는 원래 서로 욕하고 싸워야 이기는 일'로 당연시하게 되었다. 여기에 언론매체는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붙들고 늘어지며 사정없이 파헤쳐대기만 할 뿐이다. 파헤쳐진 곳에 그 어떤 사과나 책임으로 귀결되는 성숙함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정치에서 예술을 기대하기는 요원한가.

나이가 단지 숫자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그 숫자가 더해질수록 어른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어른이라면, '나'만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타인'의 감정도 살피고, 인정하며, 그들의 삶을 때로는 공감의 시선으로, 연민의 마음으로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판화가인 케테 콜비츠는 예술이 이 시대에 해야 하는 역할로 바른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평생에 걸쳐 '사회참여'를 실천한 예술가이다. 정작 부유한 부르주아 출신임에도 그녀는 소외되고, 가난하며, 힘없는 자들의 편에 서서 작품을 통해 그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대변하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른 후 예술가들이 피폐해진 현실을 외면한 채 아름다움을 어떻게 작품에 더 담아낼지 고민했다면, 콜비츠는 "미술이 아름다움만을 고집하는 것은 삶에 대한 위선"이라며 정면으로 반박한다. 예술 장르에서 판화를 선택한 이유 역시 값비싸고 소수가 즐기는 유화보다 대량 생산으로 가난한 사람들마저 작품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작품 <직조공들> 연작과 <부모>, <독일의 아이들이 굶고 있다> 등에서 콜비츠는 치열하고 아픈 현실을 진정성 있게 드러낸다. 나치의 핍박에 맞서며 전쟁을 반대하고, "나는 이 시대에 보호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닥 책임과 역할을 다 하고 싶다"는 말을 죽을 때까지 행동으로 실천한 콜비츠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예술의 모습, 그리고 어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꼰대', '꼰대질'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나이 많은 사람이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며 시대착오적인 설교를 늘어놓을 때 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 시대의 어른으로서 보여주는 모범답안까지는 차치하더라도, 뒤에서 꼰대로 지칭되기보다 '어른'의 모습으로 보이려면 어떻게 언행을 해야 할지 스스로를 점검해 보는 것도 필요한 시점이다. 정말 예술이 역할을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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