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택 청주교육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TV 방송 중에 유명인의 집을 찾아가 '신박'하게 정리를 해주는 프로그램이 있다. 주인공이 그동안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었던 물건, 어느 한 켠에 밀어두었던 잡다한 것들을 정리 전문가를 비롯한 여러 명의 연예인들이(이들은 모두 정리나 청소에 일가견이 있는 듯이 보인다) 깨끗하게 정리를 해주는 것이다. 때로는 새로운 공간의 창출로, 때로는 잡다한 것들의 환골탈태, 그 멋진 변신으로 주인공과 그 가족들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일 때도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집의 물건을 정리하고 공간에 행복을 더하는 첫 시도는 신박한 '버림'에서부터 출발한다.

인간관계에서 역시 때로는 시원한 포기, 버림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전하게 이해하려는 것은 그 노력은 가상하나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나를 모를 때도 있는데 타인이 나의 심리나 언행의 기저를 완벽히 안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연인 관계에서 더 극명히 드러난다.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고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자 할 때 다툼은 더 빈번하며, 서로 질식할 듯한 마음으로 헤어짐을 택하는 원인이 된다. 마음의 공간을 비워두는 것, 상대를 다 알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이해와 공감이 시작된다.

예술에 있어서도 '버리는 것'은 중요하다. 영화에서 '감독판', '무삭제'판이라는 말로 확장 버전이 나올 때가 있다. 감독이 피·땀·눈물의 결과물을 편집하며 가위질 한 버림의 선택은 영화를 더 밀도 있고 알차게 만들 수 있다. 미술 작품에서 버림은 동서양화를 막론하고 중요하다. '그린 곳'이 선택이고 '그리지 않은 곳'이 버린 것일 수 있다. 동양화에서 취사(取捨)의 문제는 특히 더 중요시 한다. 동양화에서의 그리지 않은 여백은 버림보다는 의도된 버림에 가깝다. 버림이 채움의 반대만은 아니다. 이것은 서로 보완적이다. 그래서 버리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앙리 마티스가 그린 로사리오 성당의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 벽화는 버림의 미학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간결하고 단순한 몇 개의 선만으로 기도하는 마음, 경배와 찬양 등 그가 표현하고자 한 그 모든 것이 나타난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을 촘촘하게 다 담아내는 것이 반드시 좋은 작품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버리는 것은 추상화에서 더 극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미술의 기본요소인 점, 선, 면, 색의 구성만으로도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 감정,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작품 한 가운데에 찍힌 검정 점만으로도 울컥하는 공감을 끌어올 수 있으며, 꼬불거리는 몇 개의 드로잉으로 웃음이 터질 수도 있다. 무슨 그림인지 절대 이해할 수 없겠다는 좌절감, 이 정도는 내가 발로 그려도 그리겠다는 개구진 마음마저 추상화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감정이니 실로 굉장히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버림의 미학'이라는 말이 있다. 켜켜이 쌓아두었던 것을 때로는 과감하게 버림으로써 여유를 찾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는 인생에서도 감정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든 것을 다 안고 가려면 무겁고 부담스럽다. 어쩌면 적당히 버릴 것은 버리고 사는 것이 '신박'하고, 행복하게 삶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인생에서도 예술에서처럼 취사선택을 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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