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 대전지법 공주지원 집행관

1979년 10월 26일은 충남 태안반도와 내륙인 아산시 인주면을 잇는 삽교방조제 준공식이 있는 날이었다.

이때까지 태안반도를 이루는 당진, 서산, 태안 등 3개 군의 주민들은 멀리 서울은 물론 내륙지방으로 왕래하려면, 당진~합덕~신례원까지 나와서 장항선 열차를 타거나 온양까지 빙 돌아서 가야만 했다.

합덕에서 당진이 23㎞이고, 당진에서 서산이 다시 25㎞, 서산에서 태안이 26㎞이니, 태안이나 멀리 안면도 주민들이 서울 한 번 가려면 그저 꿈같이 먼 길을 구비구비 돌아서 가야 했다.

삽교방조제의 준공은 태안반도의 주민들이 당진군 신평면에서 방조제길을 따라 곧장 아산으로 나가거나 아산방조제를 따라 평택으로 갈 수 있는 육로 교통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삽교호를 통한 안정적인 농업용수 공급으로 예산, 당진 지역은 전천후 농사를 짓게 되었다.

물론 이제는 평택에서 서해바다를 가로질러 놓인 서해대교를 통한 서해안 고속도로 덕택에 한층 가깝고 살기 좋은 지역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그런데 삽교방조제 준공식을 마친 바로 그날 저녁 대통령은 청와대 안가에서 자신의 고향 선배이자 중앙정보부장인 김 모의 총을 맞고 비명횡사하게 된다.

이후 정국은 대통령 유고라 하여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무총리 최 모씨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는 상황이 되었지만, 불과 달포 후인 12월 12일 저녁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인 전 모가 이끄는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세력들은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고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 모 육군참모총장을 강제연행하여 권력의 중심이 크게 바뀌게 된다.

이른바 12·12사태는 박 모 대통령의 피살사건을 계기로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수도권 지역의 주요 군 지휘관을 교체하는 내부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정치군인을 제거하려고 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전 모 합동수사본부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의 하극상에 의한 군사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적군을 향해 총을 겨눠야 할 국민의 군대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수도 서울에서 심야에 총격전을 벌이는 사상 초유의 사태인 12·12. 저녁의 승리로 신군부는 쿠테타에 성공했다

1961년 5·16 군사쿠테다로 집권한 이후 1972년 이른바 10월유신이라는 절대권력체제 아래 숨막히게 살아오던 국민들은 10·26으로 절대권력자가 사라졌다고 반가워했고,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고 할 자유를 추구하여 금방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는가 싶었지만, 이런 사회 분위기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신군부세력들은 그해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유발, 재야 세력을 억누르고 구국의 영도자로 화려하게 전면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친구들끼리 사이 좋게 대통령 자리도 주고니 받거니 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유난히 포근한 일요일이라는 한가로움이 주는 시간, 그동안 줄곳 진척이 없던 개정판 초벌집필을 마무리했다는 홀가분함 속에서 모처럼 욕조에 온수를 받아 놓고, 묵은 피로와 땀, 그리고 얼룩진 옷가지까지 한꺼번에 씻어 냈다.

물론 내일 출근하면 출판사에서 보내왔을 4차 교정지를 받아들고 다시금 마지막 교정을 하루 속히 마무리해서 보낸다면 내 역할은 끝이 난다.

이것으로 올 한 해를 마감짓는 일이 될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두번째 작업의 마무리를 위해 불을 밝혀야 할 것 같다.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12·12의 그 지워버려야 할 역사의 25년 뒤인 오늘, 그들은 오늘 어느 이날을 회고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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