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철 집배원 VS 곽혜원 집배원

"어르신, 서울 둘째 며느리가 편지 보내왔습니다. 따뜻한 겨울 옷도 있네요."

대전에서 시골이라고는 몇 남지 않은 흑석마을, 담장 안으로 들려오는 집배원의 밝은 목소리에 고향 떠난 자식 소식을 기다리던 한 노부부의 안방문이 활짝 열렸다.뜰마루 가득 내용물을 풀어 놓은 노부부는 입에 침이 마를 정도의 자식 자랑과 함께 따뜻한 숭늉 한 그릇을 건내며 집배원의 갈길을 막아섰다.

갈길 바쁜 집배용 오토바이는 주인이 또 저러고 앉은 폼이 마냥 못마땅하지만 마루? 끝에 걸터 앉은 집배원은 결코 시간에 아랑곳않는다.

생각 없는 오토바이를 꾸짖기라도 하듯 집배원은 서산의 해가 넘어가기 전 아침에 떠났던 종점으로 되돌아왔다

▲ 둔산우체국 변상철 집배원 /사진 = 김대환 기자
뜰마루 가득 내용물을 풀어 놓은 노부부는 입에 침이 마를 정도의 자식 자랑과 함께 따뜻한 숭늉 한 그릇을 건네며 집배원의 갈길을 막아섰다.

갈길 바쁜 집배용 오토바이는 주인이 또 저러고 앉은 폼이 마냥 못마땅하지만 마루? 끝에 걸터 앉은 집배원은 결코 시간에 아랑곳않는다.

생각 없는 오토바이를 꾸짖기라도 하듯 집배원은 서산의 해가 넘어가기 전 아침에 떠났던 종점으로 되돌아왔다.

"한 20년 넘게 일을 하다 보니 노하우도 생겼습니다. 이쯤하면 시간에 쫓기기보다 시간이 저를 쫓아오느라 바쁘지요."

희끗한 머리카락만큼이나 여유와 노하우가 온몸에서 묻어나는 둔산우체국 변상철(卞相喆·55) 집배원.

비슷한 시간 숨이 목까지 차오른 또 다른 집배원이 집배실 계단 입구에 다달랐다.

"골목길 차가 막혀서 선배님보다 조금 늦었네요."

다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한 치의 빈틈도 없어 보이는 중년의 곽혜숙(郭惠叔·46·여) 집배원이다.

20년이 넘는 관록과 이제 갓 3년에 접어든 신참 사이지만 자기 일에 대한 열정을 뿜어 내는 순간에 있어 이들은 맞수격 '사랑의 전령사'들이다.

다음날 배달 목록을 살펴보며 필요한 것을 챙기고 나름대로 '배달의 효율과 사고율? 저하'에 대해 의견을 나누느라 저녁 시간 집배실 한쪽에는 또 다른 열기까지 후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온종일 이어진 배달업무에 녹초가 된 몸을 이끌며 '네 일, 내 일' 미루지 않는 선후배들 사이에서 경쟁이란 단어는 찾아보기 힘들다.

선배의 노하우와 후배의 요구 사항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은 차라리 정이 듬뿍 묻어 나는 단짝의 모습이다.

특히 3D 업무로 여겨져 대부분이 기피하는 집배업무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와 역할분담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들은 정확히 알고 있다.

80년 초 양장 일을 하다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우체부'가 된 변씨의 후배 사랑은 둔산우체국 내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이젠 집배도 단순 노동보다 전문성이 요구됩니다. 또 자유로운 시간만큼 많은 책임이 주어져 잘못하면 욕도 많이 듣고요. 후배들에게 이런 부분을 자주 얘기해 줍니다."

아르바이트로 집배복장을 입었다가 마흔 중반이 되어서야 천직을 찾았다는 곽씨는 똑소리 나는 '우체부'로 선배들의 칭찬이 자자하다.

육체적 노동 강도가 높아 여인의 몸으로 수행키가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기에 더욱 그렇단다.

하지만 선배나 후배나 집배일을 하면서 공통으로 느끼는 애로사항이 있다.

세상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중 수취인의 밑도 끝도 없는 불만 사항은 인내심 강한 집배원들에게도 가끔은 참아내기 힘든 부분이다.

"가끔 문제가 발생한 우편물을 배달할 때 자초지정을 알아보지 않고 모든 책임을 집배원에게 떠넘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쌍소리에 손해배상 운운하면 정말 답답하고 화가 치밀지요."

변씨는 "때로는 집에 사람이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불리한 우편물을 받지 않기 위해? 문을 열어 주지 않을 때가 있다"며 "이런 경우 우편물 도착통지서까지 남기지만 결국 헛걸음으로 끝날 때 정말 아쉽다"고 말했다.

곽씨도 "새벽 내 분류해 아파트 배달통에 꽂아둔 우편물을 한데 섞어서 바닥에 내버린 것을 목격하면 힘이 쭉 빠진다"고 털어놨다.

예전 같지 않게 우편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고지서인 것을 보면 경기 불황에 대한 답답함도 더욱 실감케 된다.

▲ 둔산우체국 곽혜원 집배원 /사진 = 김대환 기자
곽씨는 "고지서, 독촉장 등의 우편물이 얼마나 늘었는지 따로 집계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요즘 같은 불경기에 안부를 묻는 편지는 줄고 각종 고지서 배달이 늘어 소식을 전하는 마음이 편치 않다"고 전했다.

변씨도 "옛날에는 동네 어귀에만 가도 빨간 자전거를 보고 사람들이 뛰쳐나와 반갑게 맞아 줬지만 요즘은 어림도 없다"며 "이 때문인지 제발 좋은 편지 좀 달라는 말도 자주 듣는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전한 소식을 접하고 기뻐하는 고객들 때문에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강조했다.

둘은 "어느 시골 노인처럼 자기들에게 보내온 양말 한 켤레를 선뜻 손에 쥐여 주는 따뜻한 정이 아직 남아 있다"며 "겨우 양말 한 켤레일지 모르지만 이럴 때 얼어버린 몸과 마음도 모두 녹아 버리고 일에 대한 보람도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양말 한 켤레의 뇌물(?)은 변씨와 곽씨뿐 아니라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모든 집배원들이 우편가방을 들쳐 메고 동네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를 바탕으로 서로를 보듬고 격려하며 일하고 싶은 직장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때문인지 이들이 근무하고 있는 둔산우체국은 충청체신청 관할 우체국 중에서 제일 잘나가고 집배원들이 선호하는 우체국으로 꼽힌다.

변씨는 "어느 때는 밤 10∼11시까지 일할 때도 있다"며 "이런 경우 자연스레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도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면 문제도 해결되고 일의 능률(실적)도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곽씨 역시 "새벽부터 나와 같이 일하면서 후배들이 빼놓은 부분까지 챙기고 일일이? 전화해 주는 선배들을 보면 신참들이 더 배워야 할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귀띔했다.

그러면서도 변씨는 2004년 12월을 바라보며 인생의 달력에서 또 한 해를 지워야 하는 아쉬움보다 집배원에게는 가장 고생스러운 겨울 날씨 걱정이 앞선다.

20여년의 관록도 칼바람과 눈보라 앞에서는 속절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변씨는 "당장 정년 퇴직을 앞둔 선배들도 바람 불고 눈 오는 겨울은 쩔쩔매는 그런 계절"이라며 "20∼30대 젊은 친구나 여 집배원이 큰 고충없이 따뜻한 봄날을 맞아야 할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여전히 주고받는 정(情)이 삶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믿는 '사랑의 전령사'들, 연말 골목이나 집 앞에서 혹 그들과 마주친다면 가벼운 인사 한마디쯤 건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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