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친의 殺身成仁 인술 … 그 정신 담는다

"메스 등 차갑고 무섭게만 느껴지는 수술 기구들도 아버지의 손길이 닿으면 생명을 지키기 위한 따뜻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수술을 안전하게 끝내고 소중한 생명을 구한 환자와 아버지는 의사와 환자를 넘어 인간 대 인간의 따뜻함이 묻어났습니다."

▲ 안경수 비뇨기과 원장 /사진=전우용 기자
지금은 고인이 된 부친 일당(逸堂) 안종완씨를 이어 의업에 종사하고 있는 안경수 원장.(50·안경수 비뇨기과·대전 서구 탄방동)

안 원장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봐온 아버지의 인술(仁術)에 큰 감동을 받아 일당의 뒤를 이어 의술을 펼치고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하셨던 것 같아요. 매일같이 밤을 새시며 환자들을 치료 했으니까요. 아버지가 개원해 초창기 의료활동을 벌이던 1960∼70년대 대전에는 외과병원이 3∼4곳에 불과해 응급의료시설이 절대부족한 상태였거든요. 환자는 많고 병원은 부족하니 환자 치료 때문에 편히 잠을 주무신 날보다 그렇지 못한 날이 많다해도 과언은 아니에요."

당시 어린 안군에 비쳐졌던 아버지는 '살신성인(殺身成仁)' 그 자체였다.

'환자가 많았으면 가족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았을 텐데 아버지가 놀아주지 않아 서운하진 않았느냐'는 질문에 안씨는 '아들인데 어떻게 안 서운하겠어요'라는 말과 함께 알 수 없는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면 자상함으로 우리를 안아주셨죠. 환자와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 서운함도 가시기 마련 아니겠어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제 좌우명이 '최선을 다하자'가 된 걸요."

이 말에서 그의 미소가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과 이해 그리고 사랑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내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종종 진료비가 없는 환자들이 병원을 찾아와도 일당은 그들을 결코 문전박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까지 지어서 보낼 정도였다는 것.

이런 일당의 인술에 감동받은 일부 환자들은 이후 일자리를 구해 경제력을 갖춘 뒤 진료비와 약값을 치르는 것은 물론 3대에 이르도록 일당의 진료만 받았다.

이처럼 환자를 가족처럼 생각하고 성심성의껏 진료하는 일당의 모습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보다 우선하는 참된 의사상이었다.

"환자들을 위해 헌신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 깊었어요. 저도 아버지처럼 인술을 펼치고 싶었는데, (지금)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 차남 가족사진(사진 왼쪽이 선친 일당 안종원) /사진=전우용 기자
일당의 의사상을 보며 의사가 되겠다는 다짐을 굳힌 안 원장은 사당오락(四當五落)을 실천, 중앙대 의과대학교에 당당하게 합격했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시, 의대에 입학했다고 저절로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의사가 되기 위한 빡빡하고 고된 수업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인 아버지의 멋진 모습만 봤는데 의사가 된다는 것이 만만치 않더라고요. 힘들고 어려운 수업을 다 이수해야 하고, 아버지의 응원과 격려가 없었다면 의과대를 제대로 마칠 수 없었을 거예요."

그의 말에서 일당의 존재가 얼마나 컸는가를 새삼 느꼈다.

안씨는 일당처럼 외과 전문의가 되고 싶었지만 체력 등의 문제로 비뇨기과를 전공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의술을 펼침에 있어서 차이는 없기 때문.

특히 그는 1991년 개원의 처음으로 초음파 쇄석기를 도입해 수많은 요로결석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비뇨기 관련 개원의 전문의원으로 자리를 굳혔다.

"1985년까지 서울 삼성병원에서 부과장을 맡은 뒤 같은 해 고향으로 내려왔어요. 아버지께서 개원하신 대전역? 앞 안 외과에 곁 살림을 하며 비뇨기과를 개원했죠. 의사의 꿈을 꾸게 된 것부터 전공의 과정, 개원에 이르기까지 아버지는 저에게 있어서 큰 버팀목이셨어요."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안 원장의 자녀들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의술을 펼칠 의향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안 원장은 피식 웃으며 "자식 놈들은 의사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즘 스포츠가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어서 그런지 운동선수가 되겠다네요. 하지만 다음에 생각이 바뀌어 의사가 되겠다면 물심양면으로 밀어줘야죠."

일당은 87세까지 외래 진료를 볼 정도로 의업에 열성적이었으며, 2002년 8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기 전까지 의학서적을 옆에 두고 탐독, 학문의 끝 없음도 아들에게 몸소 보여줬으며, 이를 배운 안 원장도 아직까지 의학 공부에 여념 없다.

대를 잇는다는 것은 단순히 업을 이어가는 것은 아니다. 인술에 대한 선친의 정신을 계승해 의업을 이어가고 있는 안 원장.

이런 모습에서 환자로서 의사에 대한, 인간으로서 인간에 대한 믿음이 가능하며 이런 믿음이 전제돼야만 환자들도 생명을 맡기고 수술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환자 진료를 위해 황급히 진료실로 들어가는 순간 나부끼는 하얀 가운은 그가 인술을 펼치는 참 '의사'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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