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위헌 결정 이후 충청권이 연일 분노의 함성으로 가득하다. 위헌 결정 파문의 최대 피해자인 연기군민들의 상실감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조상 대대로 농사만을 알고 살아왔던 이들이 고향을 떠나야 하는 아픔을 감수하면서 이주를 위한 담보대출까지 받았지만 이것마저 위헌 후폭풍으로 제값을 못해 파산지경에 빠졌다. 연기군민들이 꽃상여와 트랙터를 앞세우고 가두행진을 벌이면서 절규하는 모습에서 문득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1939년 발간)를 연상케 한다.

'…도로변과 도랑둑에는 이주자들로 넘쳤다. …국도변의 빈민 캠프, 굶주림에 대한 공포, 저녁을 굶은 아이들, 이런 것들이 그들을 변화시켰다. 그들은 유랑민들이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작가 스타인벡은 1930년대 미국을 휩쓴 대공황의 참상을 그렇게 묘사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1940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존 포드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한 20세기의 걸작이다. 농민들이 경작지를 잃고 새로운 이주지로 떠났지만 그곳은 그들이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와 희망의 땅이 아니었다. 기아와 질병, 그리고 자본의 착취만이 그들을 괴롭혔다.?

오늘날 연기군민들이 겪는 고통은 바로 1930년대 미국 농민들의 아픔과 일맥상통하는 구석이 많다. 1929년 증권시장의 붕괴로 촉발된 대파산의 파동으로 인해 미국 농민들도 대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미국의 상업주의가 빚은 비극을 가난한 농민들의 얼과 분노를 통해 대변한 이 작품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록 연기군의 경우 행정수도 입지주민들이라는 점에선 당시 미국 상황과 다르다고 할 수는 있으나 행정수도가 무산될 경우 치러야 할 험난한 상황을 예감케 해 준다. 고향을 떠나지도 못하고 빚더미에 눌려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이런 비참한 '유랑민'의 심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이런 상황은 정치권의 이해관계로부터 빚어진 것이고 보면 그 배신감은 하늘을 찌른다. 충청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간단 명료하다. 헌법재판소가 정치적인 논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관습헌법'이라는 구시대적인 해괴한 법리를 동원, 수도권의 기득권 보호에 앞장섰다는 것이고, 한나라당 역시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 제정의 다수세력이면서도 특정지역주의에 매달린 나머지 자신의 종전 입장을 뒤집은 모순 투성이 집단이라는 것이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여당 또한 오늘의 사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적어도 지역감정이라는 차원에서만 본다면, 그간 영·호남의 지역갈등도 모자라 수도권 대 비수도권 싸움의 새로운 불씨를 정치권이 앞장서서 지피는 형국이 아닌지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갈기갈기 찢긴 마음의 상처는 어쩌란 말인가. 이젠 그 분노의 포도송이가 연기, 공주지역은 물론 충청권을 휩쓸고 서울로 향하고 있다. 신행정수도 건설 비상시국회의를 비롯해 충청권 선출직, 사회단체가 전국 시민사회단체와 연계를 강화, 신행정수도 건설의 중단 없는 추진을 위해 조직적인 대응에 나선 이유를 곱씹어 볼 때다.?

행정수도 대신 기껏해야 부처 몇 개 옮기는 행정특별시나 행정타운 및 기업도시로 충청인의 마음을 돌리려 한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그건 결국 민심호도용에 불과한 사탕발림이다. 당초 신행정수도 건설의 명분은 수도권 집중 완화를 통해 국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려는 데 있지 않았던가. 문제가 꼬일수록 원론에서부터 풀어 가는 게 최선의 방책이다.

'그들의 눈 속에는 끓어오르는 격노의 불꽃'이 담겨 있으며, 그들의 영혼 속에는 '분노의 포도가 가득해서 심하게 익어간다'는 스타인벡의 표현처럼 무엇이 이토록 화나게 만들었나. 인간이 격노하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 것인지 가늠케 해 주는 데도 정치권이 이를 간과한 채 정쟁에 날을 지새우고 있다. 민심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 분노의 포도가 더 익어가기 전에 대안 마련에 나서도 모자랄 판에 무슨 기(氣)싸움이 그리 대단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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