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갑도 전 충북도 중앙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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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갑도 전 충북도 중앙도서관장
가을이 오면 릴케의 시 ‘가을’이 생각난다. 릴케는 "밤마다 무거운 대지가/모든 별들로부터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라고 가을을 노래했다. 자연이 그 풍요를 완성하는 때가 가을이듯이 인간은 고독과 사색으로 인간의 내면을 풍성케 하는 때가 가을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가을이 오면 공연히 낭만으로 들떠서 여행을 즐긴다. 테마가 있는 여행이면 더욱 좋고, 그렇지 못하면 그냥 혼자 훌쩍 떠나기도 한다. 이번에는 가을이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는 지난 주말, 문우들과 함께 가을 문향에 취해보고자 전북 김제에 있는 아리랑 문학관을 찾았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김제, 넓은 들판은 황금물결로 출렁이고 있었다. 이 넓은 들판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수리시설 벽골제(碧骨提)가 또한 유명하지 않은가. 아리랑문학관은 벽골제 도로 건너 맞은편에 있었다. 2층 규모의 아담한 현대식 건축물이었다. 소설 ‘아리랑’과 어울리게 농민들의 애환과 혼이 담긴, 다시 말해 우리나라의 멋과 맛이 담긴 건축물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느끼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1층 제1전시실에 들어서니 우선 곧장 보이는 것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사진 속의 초록빛 넓은 김제들판이었다. 아리랑의 배경 무대임을 직감케 했다. 그리고 작가가 5년간 집필한 아리랑의 육필원고가 높다랗게 쌓여 있었다. 2만여 장이라 한다. 우선 숨이 탁 막혀오는 충격을 받았다. 그 외 수많은 아리랑 소설과 관련된 주인공들의 험난한 대장정을 각 부로 나누어 그 줄거리를 요약한 시각 자료와 영상 자료가 전시돼 있었다.

2층 제2전시실은 아리랑이라는 소설의 집필과정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작가연보와 작품연보, 사진으로 보는 작가의 인생, 그리고 창작의 과정을 쫒아 정리된 취재수첩과 자료노트, 그리고 일상용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하나의 작품이 나오기까지 작가의 열정과 치열한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감명 깊었던 것은 집필을 하면서 사용한 세라믹 펜과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그 심이었다. 쓰레기통에 그 심을 버리는 것은 영혼의 일부를 버리는 것 같아서 버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제3전시실은 작가가 아닌, 인간 조정래의 삶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가족사진, 필기구, 안경, 펜 등 애장품과 자연석, 신문기사들, 작가 자신이 손수 그린 자화상과 아내에게 선물했던 펜화 등을 통해 작가의 소박하고 소탈한 인간적인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문학관 관람을 끝냈다. 밖으로 나오면서 많은 것을 생각게 했다. 우선 투철한 작가정신에 머리를 숙이면서 문향에 흠뻑 취해 보았다. 그리고 일제의 악랄한 수탈 속에서도 우리 한민족의 처절한 삶과 혼, 뜨거운 숨결을 느낌으로써 다시 한 번 비극의 역사를 깨닫게 했다.

"일본은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는 증거는 없다."라고 말하는 아베 총리의 왜곡된 역사인식은 한·일관계 정상화를 요원하게 만들겠다는 생각도 했다. 또 엉뚱한 생각도 했다. 릴케가 이 가을에 여기 함께 있었다면 혹독한 고독 속에 한·일관계에 대해 어떤 사색을 하였을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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