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세종특별자치시 정무부시장]
개미고개서 미군 5백여명 戰死, 조치원·금강에서도 처참한 혈투
그래서 시간 벌어 대한민국 구출

1950년 6·25전란 때 탱크를 앞세우고 물밀듯 쳐들어온 북한군이 결국 당초 목표대로 부산을 점령하지 못하고 패퇴한 것에 대해 군사전문가들은 북한군의 세 가지 작전 지연을 꼽는다.

첫째는 서울을 점령하고 승리감에 도취하여 3일을 허비한 것. 이때 김일성이 서울에 와서 3일을 머물렀는데 그 바람에 귀중한 시간을 놓쳤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지금 세종시 전의면과 전동면 경계를 이루는 개미고개 전투.

세 번째는 금강 전투와 대전 사수 작전. 그러니까 3대 전투 중 2곳이 지금의 세종시에서 있었다. 이미 7월 8일 미 24사단 34연대는 천안에서 남하하는 북한군 3,4사단을 맞아 2일간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으나 연대장 마아틴 대령이 전사를 하는 등 전선이 무너져버린 상태였다. 한국전쟁에서 첫 번째로 당하는 연대장의 전사에 사단장 딘 소장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충격적인 전황이었다. 당시 마아틴 대령은 직접 북한군 탱크 앞에서 로켓포를 발사하다 쓰러졌다.

이어 미 24사단 21연대 3대대가 천안에서 조치원으로 넘어오는 당시 국도 1호선에 위치한 개미고개 경부선 터널 좌우에 진을 쳤다. 그러나 무기라고는 거의 재래식이었기 때문에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에 맞선다는 것이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용감하게 싸우면서 북한군의 남하를 최대한 지연시키려 했다. 어떻게 해서든 일본에 대기 중이던 기갑부대가 투입될 시간을 벌어야 했던 것. 그래서 개미고개는 처참한 전투가 전개되었으나 북한군 2개 사단을 대대병력으로 막는다는 것이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7월 11일 미군은 조치원으로 퇴각했는데 개미고개에서 전체 병력 667명중 505명이 전사하고 12명이 실종된 상태였으니 얼마나 큰 희생인가!

6·25전쟁 중 이처럼 한 곳에서 500명이 넘는 미군이 전사한 곳은 개미고개 전투가 유일하다. 지금도 6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터널 입구에는 총탄의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어 그때의 치열했던 전황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미군은 개미고개에서 조치원으로 후퇴, 소수병력으로 시가전을 벌이며 북한군 남하를 7월 12일까지, 그러니까 3일간을 더 지연시켰다. 이 사이 미 24사단 멜로이 대령의 34연대가 당시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를 중심으로 '금강 라인' 방어선을 구축했다. 많은 병력을 잃은 19연대, 21연대도 가세했다.

이제 전투는 금강을 사이에 두고 금남면 일대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딘 장군은 조치원-신탄진간 도로를 폭파하고, 도로에서 탱크의 남하를 막을 장애물 설치, 금강 철교를 비롯 모든 교량 파괴를 명령했다. 이와 같은 명령에 따라 7월 13일 새벽 신탄진 철교가 폭파되었고 북한군의 남침은 주춤했다. 수차례 금강을 건너려는 시도를 했으나 워낙 미군의 화력이 강력하여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7월 5일 밤, 북한군은 빗발 같은 미군의 총격을 뚫고 금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물이 피로 붉게 물들고 북한군의 시체가 나뭇잎처럼 강위를 덮었지만 기어이 그들은 강을 건넜고 '금강 라인'은 무너지고 말았다.

지난 주 국방부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개미고개에서 발굴한 미군전사자 유해 2구를 미군에 인도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60여년 만에 흙속에서 발굴된 미군 병사의 유해를 보는 모든 이의 얼굴이 숙연했다. '코리아'라는 이름도 처음 듣는 나라에 와서 피 흘려 죽은 그들 - 그 땅에 지금 국가균형발전의 모델로 행정도시 세종시가 건설되고 있음은 참으로 감회가 깊다.

그리고 이 개미고개에 기념비를 세웠지만 역사의 현장으로 길이 보존되고 개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세종시에서 있었던 미군과 우리 군의 희생으로 대구·부산의 방어선 구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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