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사 글, 임용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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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
甲子士禍(12)

성준과 이극균의 답서는 비슷하였다.

<세좌가 당초에 중한 죄를 범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방면되었으니 성상의 은혜가 지극히 중하옵니다. 지금 세좌가 그의 집에 편안히 있는 것은 외람스런 일이오니 성 밖에 두고자 하신다는 하교가 지당하시옵니다.>

그러나 성준과 이극균은 왕이 이세좌를 성 밖에 두려 한다는 말이 다시 멀리 귀양보내려 하는 뜻임을 간파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왕은 원로대신인 윤필상을 비롯하여 육조판서와 승지 이상의 재상들을 불러 성준과 이극균의 답서를 보여 주고 그들 자신의 의견을 말하라 하였다.

영의정과 좌의정이 이세좌를 성 밖에 두고자 한다는 왕의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으니, 그것이 불가하다고 말할 용기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왕의 의도대로 되어갔다.

"신하의 죄가 불공(不恭)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내가 망령되이 스스로 존대(尊大)하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오. 대체로 군신간의 분의(分義)는 엄히 하지 않을 수 없소. 임금은 임금의 도(道)를 알고 신하는 신하의 도를 알아 군신이 각기 그 도를 다하여야 할 것이오. 만일 군신간의 분의가 엄하지 못하다면 조정 안에서 무슨 일이 바로 되겠는가? '서경'(書經)에 보면 순(舜)임금 때 사흉(四凶)의 하나인 공공(共工)이란 자를 유주(幽州)로 귀양보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대대로 벼슬을 하면서 세력을 형성하여 왕명에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었소. 불경죄를 범한 자에게는 법이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할 것이오. 지금 다시 세좌를 사람이 적고 피폐(疲弊)한 먼 곳으로 귀양보내려 하니 정배할 곳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오."

그제야 신하들은 이세좌를 성 밖에 둔다는 것이 멀리 귀양보내려는 의도였음을 알고 아차 하였다.

결국 이세좌는 강원도 평해(平海)로 다시 귀양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은 그래도 미심쩍어 주서 이희보를 가만히 미행(尾行)시켜 이세좌의 귀양길을 엿보게 하였다. 이희보는 앞서 떠난 이세좌 뒤를 쫓아 용진(龍津)으로 달려갔다.

이세좌는 초라한 행색으로 걸어가는데 그 옆에 그의 아들 수정(守貞)과 손자 두 사람이 동행하고 있을 뿐 압송해 가는 옥졸들이 없었다.

이희보가 돌아와서 본 대로 아뢰자 왕은 노하여 수정이 관직을 제 마음대로 떠났다 하여 잡아다 국문하게 하고 다시 옥졸 두 명을 급히 딸려 보내 압송하라 하였다.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대사헌 이자건 이하 사헌부 관원들 모두를 옥에 가두라는 청천대벽력 같은 엄명이 떨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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