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식

▲ 대전에 있는 국내 유일의 족보박물관 회상사

열차에서 옆 좌석 외국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마침 프랑스인이라 두어 시간 남짓 여러 화제로 담소 후 종착역에서 헤어질 때 비로소 통성명을 하였는데 그의 성은 포드뱅(Potdevin). 대단히 희귀한 성이었다. 지금껏 수십 년간 프랑스인들과 교류하고 있지만 포드뱅이라는 성은 처음 접했다. 그 스스로도 자기 성은 드물다고 약간 겸연쩍은 웃음을 지어보이며 헤어졌다.

포드뱅, 우리말로 옮기면 술단지, 포도주를 담는 통… 이런 뜻인데 아마도 선조가 포도주 관련 직업에 종사하신 연유로 추측해본다. 널리 알려진 대로 유럽인 성은 조상들의 직업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다. 영국에서는 재단사를 지칭하는 테일러, 대장간에서 일하는 스미스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고 프랑스인들은 샤르팡티에(목수), 르베리에(유리제조업), 플라시에(교회에서 좌석안내담당) 같이 고색창연한 가문명칭에서 그 옛날 삶의 모습을 짐작해본다.

주거하거나 활동하던 지역과의 연관성으로는 일본인 성이 으뜸으로 꼽힌다. 나카무라(마을 한복판), 하시모토(다리 밑), 다나카(밭 가운데), 모리시타(숲 아래), 이노우에(우물 위) 같이 유난히 특정 장소와 위치를 나타내는 문자를 성으로 삼고 있으니 문화, 사회사적으로 연구해볼만 하다. 토요토미(豊臣), 토쿠카와(德川) 같이 비교적 전통 있는 특정 가문에서는 이런 지역, 위치이름에서 다소 벗어나는 추상적인 성을 쓰고 있어 대비된다.

서양에서는 이름과 성이 엇갈려 쓰이는 경우도 많다. 같은 어원인 챨스, 샤를, 칼(Charles, Karl) 등은 이름에 많이 쓰이는데 이것을 성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홍길동이라는 이름에서 길동을 성으로 쓰는 사례이다. 외국의 이런저런 성씨 풍습에 비하여 우리의 가문내력과 이를 기록한 족보 그리고 주로 오행설을 활용하는 돌림자(항렬) 전통은 독특한 씨족문화의 표상으로 전승할 만하다. 근래 우리말 이름 선호, 항렬자 기피 등 급격한 이름문화의 변화로 오래 이어온 문화유산의 멸실이 우려된다. 우리나라 족보와 돌림자 풍습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만한 독특한 무형문화재이건만 요즈음 아무런 성찰 없이 마냥 팽개쳐지는 듯하여 아쉬울 따름이다.

<논설위원·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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