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사 글, 임용운 그림

? ?
?
? ?
?

제 4부 愼言牌와 承命牌
甲子士禍(7)


왕은 사헌부의 상소를 매우 불쾌히 생각하였다.

입직승지는 왕의 성난 표정이 두려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지금 사헌부에서 아뢴 것을 보니 '장숙용이 대궐에 깊이 거처하니 사가에 나가 있을 이치가 만무하다'하였는데 이 말이 임금을 업신여기는 풍습이 아닌가. 지금 바야흐로 임금을 업신여기는 나쁜 풍습을 통렬히 없애려 하는데, 사헌부에서 민원을 빙자하여 간(諫)한다는 이름을 들으려고 이같이 임금을 업신여기는 일을 해도 되는 것인지 사헌부에 묻고 승지들의 의견도 말하오."

"전하. 사헌부가 아뢴 뜻은 장숙용이 밖에 나가 거처하지 않는데 이웃집을 철거하니 민원이 있을까 염려하여 진계(進啓)한다는 것이 말이 좀 잘못된 것이옵지 감히 전하를 없신여기는 마음에서 그런 것은 아닌 줄로 사료되옵니다."

얼마 후에 사헌부에서 올라온 해명서도 승지의 말과 비슷하였다.

왕은 사헌부가 잘못을 시인하고 굴복한 것으로 간주하고 녹수의 사가 이웃집들을 철거하는 일을 강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녹수의 형부 김효손은 동반직에 임명한 것은 원래의 군직에서 품계를 낮추어 임명한 것이므로 무방하다 하고, 다만 장사치인 최수여산은 군직을 주지 말고 사약(대궐안 문 열쇠 등을 보관하는 액정서의 벼슬)이나 내수사(內需司) 서제(書題)로 고쳐 임명하라고 하였다.

어쨌거나 녹수의 베갯밑공사로 성사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어머니 대역(代役)으로 모자(母子) 놀음이라는 이름의 희한한 근친간(近親姦) 흉내의 농탕질로, 망모(亡母)를 사모하는 심병이 응어리진 왕의 에디푸스 컴플렉스를 만족시켜줌으로써 녹수는 언제나 왕을 어린애 다루듯 하며 무엇이든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왕이 녹수에게만 침혹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장녹수 외에도 총애하는 궁첩이 많이 있었다. 봉접이 꿀을 찾아 이 꽃 저 꽃으로 날아다니듯 왕은 마음 내키는 대로 궁첩을 찾아다니며 향락하였다.

그러면서도 왕은 만족할 줄 모르고 더 많은 미인을 갖고 싶어하였다.

<15세에서 30세까지의 양민의 집 딸 및 재상, 조관(朝官), 사족(士族)의 양첩(良妾)의 딸 등을 후궁으로 간택하려 하니 예조에서 조사하여 서계(書啓)하게 하고 만일 병을 핑계하는 등의 거짓으로 예궐(詣闕)을 기피하려 할 때는 그 아비를 국문하라.>

이와 같은 어명이 내린 것은 춤삼월이 되면서였다.

딸 덕에 부원군한다는 말도 있고, 녹수가 천하의 부모 마음에 아들보다 딸 낳기를 더 바라게 만들었다는 노래까지 유행하였으나 부모들 마음은 딸을 궁중에 들여보내는 것을 꺼려하였다.

저작권자 © 충청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