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상공회의소(6) 신군부시대

79년 10·26과 12·12 사태가 연거푸 터지며 신군부의 시대가 태동했다.

급기야 이듬해 5월 광주에서는 시민군과 계엄군이 총검을 겨누는 전시상황이 벌어졌다.

국회는 문을 닫았고 각 지방은 군관구사령관, 도지사, 교육감, 검사장, 정보부 지부장, 보안 부대장, 향토 사단장 등 7인 위원회가 설치돼 모든 시책을 결정하는 비상체제가 가동되고 있었다.

▲ 제11대 대전상의 임원 선거.
당시 대전상의는 지금은 고인이 된 송덕영 회장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무소불위의 힘을 갖고 있던 군부는 송 회장의 후임 선거가 시작될 즈음, 김모씨를 내천하고 힘을 실어 주었다.

유일한 민선 기관장인 상의까지 군부의 뜻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 없다는 논리를 앞세워 군부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는 김씨의 대항마로 출사표를 던진 이가 이인구 계룡건설 회장이었다.

이인구 회장은 ▲도의 예산지원을 거부하고 순수 민간기관으로 거듭나겠다 ▲부지가 대전시 소유인 상의건물을 완전한 상의 건물로 만들겠다 ▲외압 없이 상의 간부직원에 대한 쇄신 인사를 단행하겠다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선거에 임했다.그러나 선거를 며칠 앞두고 상대편 김모씨가 후보 사퇴를 선언해 이인구씨는 11대 대전상의 회장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 제11·12대 이인구 회장
취임 후 이 회장은 3가지 공약사항을 완벽하게 이루어 냈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사업이 상의 부지 매입이었다.

현재 삼성화재 사옥으로 사용하고 있는 은행동 당시 상의 회관은 건물은 상의 소유였지만 부지는 대전시 소유였다. 대전시는 상의 건물을 시가 매입할 테니 상의를 타처로 옮기라는 내용의 최고장을 발송한 처지였다.

이인구 회장은 심대평 당시 대전시장을 찾아가 담판을 짓고, 상의 부지를 매입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비로소 대전상의는 건물과 토지를 완전하게 갖춘 회관을 소유할 수 있게 됐다.

회관 문제를 매듭지은 후 대전상의는 기업들의 자금난 개선을 위해 움직였다.

열악한 금융환경 탓에 늘 자금난에 허덕이던 지역 상공인들은 충청은행을 찾아가 1년에 설과 추석 2회만큼은 상의가 배정하는 기업에 자금을 지원토록 요구했다.

끈질긴 설득과 투쟁으로 대전상의는 연 2회에 걸쳐 100억∼200억원 규모의 특별여신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됐다.

이 시기는 노조활동이 본격화되고 쟁의가 빈발해 문을 닫는 기업들이 속출할 때이기도 하다.

당시는 경총(경영자총연합)이란 조직이 구성되기 전으로 상의가 경총 역할까지 겸하던 시절이었다.

▲ 1986년 노사협의회 대표 회의.
이인구 회장은 한국노총 충남지부 송범섭 의장에게 대전상의 회장과 한노총 충남지부 의장이 공동 의장이 되는 노사협의회를 구성하자고 제의했고, 노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사용자와 노동자가 머리를 맞대고 파트너십을 발휘하기 시작한 이후 그토록 들끓었던 노사분규는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화물조합 분규의 타결은 정말 극적이었습니다. 우선 분쟁 당사 기업의 노사 쌍방 대표 5인씩 모두 10인을 선발해 분쟁조정위원회를 구성토록 했지요. 분쟁이 타결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문 밖을 나설 수 없도록 규정을 만들어 외부에서 음식물을 배달시켜 가며 3일간 협상을 벌였어요. 타협을 안 할 수가 없었지요. 결국 원만하게 타결이 됐습니다."

이인구 회장은 11대 회장 재임시 직접 겪었던 화물조합의 분규사태를 해결했던 기억을 되짚었다.

85년 11대 임기를 마치면서 이 회장은 12대를 연임했지만 당선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12대를 끝으로 더 이상의 연임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표했다.

아울러 이 자리에서 그는 "3000평 규모의 대지를 확보해 20층 규모로 새로운 상의 건물을 짓고 여기에 상의와 관련된 각종 협회와 단체를 유치, 이 수익금으로 상의 운영비를 충당해 앞으로는 회원사들로부터 회비를 징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이 회장은 곧바로 9인으로 구성된 상의 회관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위원회는 현재의 시민회관 뒤편에 3000여평의 부지를 건립 후보지로 확정하는 등 구체적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이때부터 상의 내부에서 잡음이 생겨나기 시작해 상의 회관 건립이 백지화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해당 부지는 계룡건설이 토지공사로부터 매입한 땅으로 이 회장은 매입 원가로 상의에 소유권을 넘기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색안경을 쓰고 일의 추진을 바라보는? 이들이 각종 음해성 소문을 퍼뜨려 이 회장이 사업추진 중단을 선언한 것이다.

▲ 대전직할시 승격에 관한 협의회.
훗날 이 회장은 상의 회관으로 제공하려했던 땅에 아파트를 분양해 대박을 터뜨렸지만 많은 회원들은 상의 회관 건립 불발을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인구 회장이 12대 상의 회장으로 활동하던 기간 중 6월 항쟁을 비롯해 개헌, 13대 국회의원 총선 등 정국의 회오리가 이어졌다.

13대 국회 입성을 목표로 삼았던 이인구 회장은 임기 1년을 앞두고 상의 회장을 사임하는 용단을 내리게 된다.

상의 회장이 국회의원을 겸할 수 없다는 규제는 어디에도 없었다.

때문에 사임을 만류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그는 특유의 고집을 앞세워 상의 회장직을 내놓고 만다.

"당시 내가 상대할 인물은 정계의 거물인 천영성씨였어요. 만일 낙선한다면 상공인들을 볼 낯이 없다는 생각에 무소속을 고집했습니다. 무소속으로 모든 준비를 하던 중 신민주공화당에 스카우트돼 결국 당적을 갖고 출마했고, 당선의 기쁨을 누리게 됐지요. 이때부터는 국회의원 신분으로 지역 상공인들을 위한 간접 지원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 회장은 임기를 1년 채우지 못하고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당시를 술회했다.

"이제 와서 얘기지만 11대 상의 회장에 출사표를 던지기 직전 군부로부터 미움을 사 삼청교육대 입소 대상으로 지목돼 서울로 몸을 피하는 일까지 있었어요. 군부가 차기 회장을 지목한 상태에서 반기를 들었으니. 그때 삼청교육대에 입소했더라면 과연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가끔 혼자 생각하고 웃곤 합니다."

11·12대 회장 시절 얘기를 전해 주던 이인구 회장은 자리를 정리하기 직전 불연듯 삼청교육대 입소 대상으로 지목됐던 사실을 얘기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이 회장이 삼청교육대에 입소했더라면 대전상의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또 오늘의 계룡건설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자못 궁금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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