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자 생활공감주부모니터

겨울동안의 눅진한 세월의 색에서 화사한 물감으로 단장한 봄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을 설계할 싱싱한 힘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어깨동무하듯 언 땅을 비집고 올라온 꽃들은 우리의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자연은 죽은 듯 고요하지만 대지와의 만남을 준비하며 환희의 웃음꽃을 피우는 잔인한 사월의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우아한 흰 빛을 뿜어대는 목련은 눈물을 떨어뜨리듯 벌써 떠남이란 아픔을 잉태하고 있다. ‘살아있음’을 노래하고, 삶에의 가치에 몰두하고 있을 때에도 헤어짐은 늘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사도 그렇다. 만남이 지속될 것으로 여기고, 더불어 같이 있음에 행복해 하지만 불현듯 '분리됨'의 안타까움은 찾아온다.

올해 첫 충청투데이 독자위원회가 대전 현충원에서 있었다. 그 곳에서 호국 영령들에 대한 참배가 있었고 천안함 사건으로 생을 달리한 젊은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슬픔을 함께하는 시간도 가졌다. 평일이었고 특별한 행사가 없었지만 현충원의 가라앉은 분위기는 참배객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곳에서 만난 한 어머니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아들의 생일에 찾아와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붉은 눈을 하고 있었고, 전역 일에 맞춰 온 듯한 또 다른 묘역의 부모는 제대 후, 만남의 기쁨을 그리움의 통한으로 되새김하며 성근 이를 꽉 다물고 있었다.

개인과 국가는 상호의존적이며 협동적인 상호작용을 하면서 유기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가치를 무의식 중에 머리와 가슴으로 받아들이기에 나라를 지키다가 산화한 젊은이들의 희생을 기리고 그 주변인들의 아픔과 함께 한다.

그러나 개인도, 국가도 너무 쉽게 잊고 결국 자식을 가슴에 묻고 아린 아픔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가족의 몫이다.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망각의 바다’에 빠져 ‘일회용 반창고’로 상처와 치료를 반복할 것인가! 개인의 배려, 국가의 체계적인 원호시스템 그 밖의 다양한 사회안전망 등 거창한 구호와 호들갑에 이미 지쳤다.

삶 속에서의 구체적인 아픔이 내 일이 아닐 때 우린 빠르게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해 내지 못하고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간다. 그러다가 특별한 날에, 특별한 방식으로 야단법석을 떨면서 TV 화면에 대고 핏대를 세우거나 성금을 내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렇지만 굳이 두둑한 자금이 아니어도 좋고 커다란 권력이 아니어도 좋다.

우리 모두는 ‘예비 수혜자’이지 않는가! 아무리 작은 나눔과 베풂일지라도 그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다시 나눔과 베풂을 준비하기 위한 전제조건임을 마음에 새겨두자. ‘살아있음’의 즐거움에 숨어있는 ‘분리됨’의 슬픔을 우리 모두 갖고 있음을 일상 속에서 작은 실천을 통해 지속적으로 생활화 하자.

누군가는 피어오르는 봄의 기쁨을 노래하지만 또 다른 이는 자기와의 힘겨운 겨룸에 아파하고 있다. 그 슬픔을 나누어 질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용혜원님은 ‘꽃샘 바람이 차가운 것은’이라는 시에서 “나는 절대로 슬퍼할 수 없다 / 이는 거짓말입니다 / 대나무는 마디가 있기에 성장하고 / 또 그러기에 대나무가 아니겠습니까?(중략) 꽃샘바람이 차가운 것도 / 꽃을 피우기 위해서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꽃샘바람의 차가움을 견뎌 내도록 서로 위안이 되는 따뜻하고 화사한 봄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한다. 대전 현충원에서 남몰래 눈물을 삼키고 있는 이들을 만나면서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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