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3월 10일 12시. 구 경성제국대학 병원에서 평생을 항일 구국운동으로 일관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 향년 60세를 끝으로 생을 마감했다.

평생 신명을 바쳐 목마르게 기다리던 조국의 광복을 불과 7년 남짓 앞둔 시점이었다.

도산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성이 도롱섬에서 안흥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도산은 3·1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해 기반조성에 주력했다. 1923년 임정내부의 분열을 수습하고 민족운동의 통합과 임정개조를 위해 국미대표회의를 주도했으나 창조파 등 좌익의 반대로 실패한다. 1926년 독립운동의 역량을 통합시켜보려고 중국 각지를 순회하며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창립을 선도했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일본 경찰에 페포, 서울로 압송된 그는 4년형을 받고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른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재수감돼 고초를 겪으면서 중병을 얻어 보석, 입원 중 파란많은 일생을 마쳤다.

그는 “목인(일본 명치천황의 이름)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다.”, “낙…심…마…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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