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토일]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이 다시 후퇴하게 되자 피난민들은 폭파된 평양의 대동강 철교를 타고, 자유를 향해 처절하고 험난한 피난의 길에 올랐다.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 거제도.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거제도를 검색하면 펜션추천, 관광코스, 낚시, 맛집 등이 연관검색어로 올라있다. 하지만 거제는 남해의 아름다움과 함께 현대사의 상처도 간직한 곳이다. 세월이 흘러 육지와 다리로 연결돼 거제도가 섬이 아닌 섬이 됐듯, 역사의 상처 또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와 미래를 살아갈 후손을 위한 '공원'이 됐다. 그곳이 바로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이다.

◆'크게 사람들을 구제하는 섬(巨濟島)'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많은 포로가 생겨 수용시설이 부족해지자 유엔군은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배밖에 없던 거제도(현 거제시 고현·수월리 등)에 수용소를 설치했다.

1951년 2월 업무를 시작한 거제도포로수용소는 1200㏊ 규모에 4개 구역과 28개의 수용동으로 구성됐으며, 최대 17만3000여명이 수용됐다. 이와 함께 수용시설과 규모를 자체 지원할 수 있는 비행장, 항구, 보급창, 발전선박, 병원 등이 운영됐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생겨난 거제도포로수용소는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또 하나의 전장

1949년 제네바협정에 따른 포로 자유송환을 유엔군이 주장하면서 포로들은 반공-친공파로 분열, 학살·폭동·투쟁 등이 빈번했다(사실 유엔군은 포로들의 본국 귀환을 포기시키려고 협박·고문을 일삼았고 이것이 분열의 촉매역할을 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1952년 5월7일 수용소 소장 도드 준장 납치사건이다. 이 사건은 76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이 자유송환방침 철회 등을 요구하며 일으킨 일련의 소요사건으로 6월10일 무력진압됐다.

이렇듯 거제도포로수용소는 전쟁에서 분리된 곳이 아닌 또 하나의 전장이었고, 이데올로기 갈등의 축소판이었다. 당시 포로수용소 상황은 최인훈 소설 '광장'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전쟁에서 평화로

경비대 막사, PX 등 일부만 남아있던 거제포로수용소 유적지에 1999년 야외캠프와 일부 유적지가 확장된 유적관이 개장됐다. 그 후 2002년 11월30일 유적공원이 준공됐고, 2005년 5월27일 흥남철수작전 기념조형물이 생겼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인 탱크전시관(북한군 남침 선봉에 섰던 소련제 T-34탱크 모형)에는 이승만, 맥아더, 매슈 리지웨이(6·25전쟁 당시 극동연합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스탈린 등 6·25전쟁 주요 인물들의 밀납인형이 있다. 탱크전시관을 지나면 포로수용소를 재현한 디오라마관과 전쟁의 과정을 담은 6·25역사관이 있으며, 이후 피난민들의 처절함이 진하게 느껴지는 대동강철교와 MP다리를 지나면 포로생활관, 포로생포관, 포로수송, 여자포로관(당시 여자포로들은 64야전병원 간호사로 동원되기도 했다), 포로사상대립관, 폭동체험관, 포로설득관, 포로 귀환·송환 등이 이어진다.

유적공원을 돌고나면 전쟁은 단순히 영화, 드라마의 한 장면이 아닌 상처로 다가온다. 6·25는 단지 국사책 속 한 구절이 아닌 수백만명이 희생된 '동족상잔의 비극'인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단순히 암울한 과거의 재현이 아닌 참혹한 전쟁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진실을 배우는 산 교육장이며, 평화와 통일에 대한 바람이 담긴 곳이다. 지금도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매달아 놓은 희망리본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입장료=어른 3000원, 어린이 1000원(☏055-639-8125).

거제=노진호 기자 windlake@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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