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영 전혁림 미술관

삶이 권태롭거나 힘겨울 때 재래시장에 나가보라고 한다. 특히 수산물 시장은 일상의 따분함과 우울을 씻어준다. 수족관이나 함지박 안에서 퍼득이는 생선과 해산물의 생동감, 활력은 무기력에 지친 우리의 감정을 추슬러 끌어 올린다. 곧 팔려나가 죽을 목숨인 생선들도 저리 펄펄 뛰며 생명의 소중함을 확인하는데 남아있는 삶이 오래인 우리들은 왜 찰나의 비탄, 순간적인 절망에 그토록 시달릴까. 오늘의 고민과 좌절, 실망은 뒷날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데 지금, 이 순간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의 함정, 독단의 위력은 과연 무엇일까.

대진 고속도로 개통으로 대전과 통영, 삼천포, 남해, 거제 같은 남쪽지방 바닷가 도시들과 가까워졌다. 두어 시간 남짓이면 남해바다를 만날 수 있게 되어 충청도 사람들의 바다 나들이가 수월해졌다. 외지인들의 잦은 발길로 종전 순박하던 그 지방 수산물 상인들의 인심이 야박해지고 덩달아 가격도 올랐다는데 그럼에도 종래 서해로만 쏠리던 바다체험의 무대가 넓어진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통영. 예전 충무라고 불렀던 인구 14만 남짓한 이 소도시의 문화적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독특한 도시색채는 인상적이다. 유치환, 박경리, 김상옥, 김춘수 선생 같은 우리문학의 거장을 배출했고 작곡가 윤이상 선생 역시 통영 출신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전혁림 화백은 중앙과는 거리가 멀지만 화단에서 손꼽히는 지명도로 작품세계를 인정받은 몇 안 되는 지역화가 중의 한 분이다. 통영시내에 자비로 전혁림 미술관을 조성하고 타계하기 얼마 전까지 매일 일정한 시간 작업실에 나와 그림을 그리며 찾아오는 관람객들과 소통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중앙 문화예술계에서 소모적인 권력다툼을 벌이고 합종연횡 이합집산 편가르기를 일삼으며 정치인을 능가하는 패거리 문화에 골몰하는 동안 지역 예술인들은 작품창작에 몰두하고 개성적인 예술세계 구축에 애쓸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있다. 전혁림 선생의 사례는 그런 면에서 크게 본받을 만하다. 무슨 무슨 허울뿐인 협회며 크고 작은 상(賞)타기와 감투 얻기에 골몰하여 예술가로서의 본분에 소홀하는 세속을 벗어나 삶을 시종하여 탁월한 작품세계 천착에 매진한 통영출신 예술가들의 기량과 자부심은 높이 살만 하다. 그러하기에 통영시를 비롯한 각급 기관단체들이 앞 다투어 이들의 성취를 현양하는 문화공간을 조성하고 있다. 지금 작은 도시 통영에서 크고 넓게 빛나는 예술향기와 도시의 격조는 특히 문화예술인들의 권력다툼이나 세속적 입신양명 지향의 덧없음을 깨우쳐 준다.

유치환, 박경리, 윤이상, 전혁림 같은 분들의 미덕과 교훈은 예술의 권력화, 패거리 조성, 문화의 세속화 상품화에 대한 한결같은 무언의 저항이었다.

<논설위원·한남대 프랑스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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